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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07. 2022

무자비하고 서늘한 삶,
완강하고 끈질긴 시선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는 세 편의 중편소설 -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 이 하나로 연결된 연작소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혜를 중심으로 가족들의 마찰과 파멸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렸다. 세 편의 이야기에는 정작 당사자인 영혜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 독자는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라는 주변인의 필터를 거쳐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기에 동물성을 거부하고 식물성을 갈망하는 영혜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는다. 대체 그녀는 살면서 얼마나 큰 상처와 환멸을 느꼈기에 인간이라는 종을 버리고 싶었을까? 



 

   영혜는 엄밀히 말하면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그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 남편과 남편의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이 - 그렇게 정의 내린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가장 외곽에 존재하는 이들이 채식주의자였을 것이다. 그 경계 너머는 미친 사람, 정신이상자, 혹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다.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게 된 계기는 꿈이었다. 생생하고 끔찍한 날고기의 감촉, 죽고 죽이는 살해의 감각, 명치에 목숨들이 걸린 느낌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p.60)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먹고 먹히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육식은 본능’(p.31)이고 채식은 ‘자연스럽지가 않’(p.31)다고 단언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강제로 그녀의 입 안에 고기를 집어넣기까지 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을 방관한다. 영혜는 결국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폭언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경계 저편으로 단숨에 건너간다. ‘미친다는 건’(p.203), 영혜의 언니 인혜의 말처럼, ‘생각보다 간단한 건지도’(p.203) 모른다.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0-61)     


   그녀는 사실 아픈 사람이었다. 마음에 검은 구멍이 생겼는데 자꾸 들여다보다가 삼켜진 사람.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녀의 상태를 짐작하고도 ‘하나의 질환일 뿐이지, 흠이 아니야’(p.26)라는 게 ‘어디까지나 남의 일에 한해서’(p.26)라고 못 박았다. 이토록 무감하고 이기적인 남편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감당해야 했던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을까? 왜 그녀에게 남편은, 부모와 형제자매는, ‘철저한 타인, 혹은 적’(p.82)이어야 했을까? 왜 아무도 고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표출된 그녀의 내상을 알아채고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하지 않았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p.192)이라는 인혜의 회한은 늦어도 너무 늦게 찾아온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라는 남자가 아픈 그녀를 이용하기 전에는. 그는 영혜의 몸에 아직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에 원시적 순수를 느끼고 욕망을 품는다. “꽃을 그릴 거야”(p,95)라는 말은 영혜를 포획할 틀이었다. 예술로 포장한 검은 충동. 꽃과 바디페인팅은 영락없는 포식자의 카모플라쥬, 즉 위장술과 유인책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도 식물성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처럼, 마치 영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인 것처럼 꾸몄고 속였다. 삶과 철저히 유리된 그는, 예술이라면 뭐든 허용된다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예술적 열정과 세속적 욕망의 경계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아내도, 아들도, 삶도, 심지어 작품도 스스로 버렸다. 그의 행위는 포식자의 사냥일 뿐이었고 잠시 포만감에 취했는지 모르나 곧 먹잇감의 독이 퍼져 사멸했다. 화려한 색채를 띠는 식물은 대개 독풀인 법이니까.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175)


   그렇다면 영혜는 바라던 대로 식물이 되었는가. 식음을 전폐하고 대신 광합성을 하면, 물구나무를 서서 숲에 뿌리내리는 것을 상상하면, 나무가 될 수 있는 건가. 안타깝게도 무슨 수를 써도 인간이라는 종족을 벗어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처럼 최악을 맞닥뜨리고도 살아갈 방도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맨정신에 이 모든 과정을 겪은 그녀도 영혜만큼이나 아팠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두가 외면한 영혜를 끝까지 돌본다. 아들과 ‘그애가 지워준 책임’(p.204)을 상기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소설의 끝에서 인혜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은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p.205) 것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본다면, 숲속의 나무도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p.206)이라는 것과 ‘무언가에 항의하듯’(p.221) 삶을 응시하는 인혜의 끈질긴 눈길일 것이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p.221)


한강 <<채식주의자>>




*이미지 출처: Kell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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