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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21. 2022

우연+상상=무한한 이야기

영화 <우연과 상상>(하마구치 류스케, 2021)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연에서 비롯된 사건이 인물의 상상을 거치면 하나의 독특한 서사가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2021)은 이처럼 ‘우연과 상상이 빚어낸 기막힌 콜라보레이션’ 세 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1화.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 2화. ‘문을 열어 둔 채로’, 3화. ‘다시 한 번’. 사실 삶에서 우연이라는 장치는 생각보다 자주 작동할 뿐 아니라 때때로 인생의 방향을 틀어버릴 만큼 강력하다. 우리의 상상이란 또 얼마나 섣부르고 위험하고 엉뚱한지, 우연에 상상이 만나면 그 미래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이야기가 된다. ‘우연+상상=무한한 이야기’다.    




마법보다 불확실한 우연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에서 주인공은 20대 여성 메이코다. 메이코는 절친인 츠구미와 택시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최근에 만나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낸 남자가 우연하게도 자신의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츠구미의 얘기를 통해 전 남자친구 카즈야키가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메이코는 그 길로 헤어진 지 2년이나 된 그를 찾아간다. 메이코는 츠구미와 카즈야키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모든 걸 밝히는 상상을 하지만, 결국에는 비밀로 묻어두기로 하고 츠구미와의 우정을 지킨다. 우연은 마법같이 오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마법보다 불확실하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믿어볼 생각 있어?”라는 메이코의 물음은 우연이 만든 인연을 한번 믿어보겠냐는 말로 들린다. 



상상의 문을 열어둔 채로 


    두 번째 이야기 ‘문을 열어 둔 채로’에선 30대 주부이자 늦깎이 여대생인 나오가 주인공이다. 나오는 섹스 파트너인 사사키의 부탁으로 세가와 교수를 유혹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세가와 교수 앞에서 그의 소설의 에로틱한 대목을 낭독하면 그가 성적으로 반응할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문을 열어 둔 채로’ 대화를 나누기를 요구하고 오히려 그녀의 고민에 진지한 조언과 격려를 해 준다. 나오는 그와의 대화에서 위로를 받고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여기서 우연은 짓궂게 작용해서, 나오가 실수로 잘못 입력한 이메일 주소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세가와 교수는 잠적하게 된다. 이젠 우연의 장난이 사건의 발단이 된 사사키를 찾아갈 차례.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게 되고, 나오는 그에게 (복수의) 키스를 함으로써 그의 상상을 부추긴다. 이후에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졌을지, 감독은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우연과 상상을 다시 한 번


    마지막이자 세 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인 ‘다시 한 번’은 40대 중년 여성 나츠코의 이야기다. 동창회 참석을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녀는 우연히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녀가 그리워하던 동창을 만난다. 두 사람은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서로가 서로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음을 알게 된다. 그대로 실망한 채 돌아설 수도 있었지만, 둘은 상대의 동창을 상상해서 역할극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가슴에 생긴 구멍을 메워보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깨닫는다. 헤어지기 전 이들은 처음 만났던 에스컬레이터에서 ‘다시 한 번’ 우연한 만남을 연기하면서 우연을 아름다운 인연으로 승화시킨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어 두 번째다. 처음엔 낯설게 다가왔던 긴 대사와 연극적인 장면 연출이 그새 익숙해졌다. 이제는 주제를 돋보이게 하고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감독 특유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모두 여성(20대, 30대, 40대)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어딘가 아픔이 있고 약점이 있는 그녀들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이들이 결코 관계에 있어 미숙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솔직하고 정직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작에 이어 감독이 작품에 표현하는 여성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는 뮤즈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정해진 계획과 의도를 벗어나 우연에 내맡겨질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누군가는 우연을 부정하며 삶을 정상 궤도로 재빨리 되돌리려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수동적인 태도로 체념하고 만다. 차라리 그럴 때 적극적인 환대는 어떨까? 비록 우연이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일지라도 상상의 ‘문을 열어둔 채로’ 기쁘게 맞는다면. 그러면 우연과 상상이 빚어내는 무한한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우리 삶에 펼쳐지지 않을까.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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