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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l 19. 2022

삶의 격랑과 함께
이야기의 파도가 밀려온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장편소설 <바닷가에서>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난민이자 망명 신청자다. 익히 들어서 별것 아니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이 아니다. (p.17)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장편소설 <바닷가에서> (문학동네, 2022)는 영국으로 망명 온 잔지바르 출신의 난민 두 사람의 이야기다. 소설은 예순다섯 살의 나이에 목숨의 위협을 느껴 망명길에 오른 살레 오마르의 이야기(‘유물’)로 시작해서 그보다 삼십여 년 전에 먼저 고향을 등진 라티프 마흐무드의 이야기(‘라티프’)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침묵’)에 이르러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이 겹쳤다가 흩어지고 낯선 땅에서 다시 포개지게 된 복잡한 사연이 긴 대화를 통해 드러나면서 끝이 난다. ‘그들은 어쩌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까?’(p.214)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이야기에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방인의 두 번째 삶’(p.13)을 살아도 앞선 삶에서 완벽히 단절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살레 오마르가 ‘라자브 샤아반’이라는 다른 사람(라티프의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도, 라티프 마흐무드가 ‘이스마일’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도 그들의 소식은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대대로 이어진 집안의 악연과 보복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어 떠나왔음에도 두 사람이 이국에서 만나게 되는 건, 어떤 괴팍한 이의 계획인 걸까? “삶은 우리를 그렇게 끌고 다니지.”(p.222)라는 엘레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인 무언가, 우리 삶에 없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써 이야기를 짓게 되는 걸까?    

 

    한편으로, 그들도 언젠가는 이전 삶에 남겨두고 온 것들을 직면해야 할 순간이 오리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향수, 회한,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유물을 말이다. 살레 오마르는 젊은 시절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해 겪은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충동’(p.12)을 느끼고 있었고, 라티프 마흐무드는 자신의 무지로는 ‘절대 채울 수 없을 공백’(p.336)을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채우게 되길 바랐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뒤엉킨 삶을 고해하고, 반박하고, 변명하면서 과거의 진실을 되짚어간다.   

   

    하지만 어쩌면 삶에서 하나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와 내 가족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지 간에 내겐 악인으로 기억되고, 반대로 내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 일은 기억에서 마모되고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어 있으니까. 두 사람은 각자의 처지에서 재구성되었을 불확실한 기억을 맞춰보면서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화해에 이르는 데 필요했던 건, 완전무결한 진실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과 상대를 향한 ‘연민’(p.313) 그리고 ‘약간의 친절함’(p.392)이었다.     




    이 소설은 두 난민과 그들의 비극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엔 이야기와 이야기꾼에 관한 게 아닐까 싶다. 사건의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건 무심이라는 계절풍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 후세인이라는 한 이야기꾼의 짓궂은 장난에서 시작됐다.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들이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걸고 도박을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탐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이야기는 그렇게 위험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자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심지어 실제 삶보다 이야기 속에서 실재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이야기꾼이고 동시에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신비한 궤짝 속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의 정령 같다. 난민과 정착민,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떠남과 도착의 오디세이가 끝없이 펼쳐진다. 무수한 인용문과 전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천일야화>에서처럼 삶을 연장하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형태를 바꾸고, 도망치려고 발버둥”(p.213)친다는 소설 속 문장이 파도를 연상시켰다. 바닷가에서 이야기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을 한참 넋 놓고 바라본 것만 같다. 단지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그 순간들을 본 것 같았다. 살레 오마르가 라티프 마흐무드에게 하산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당신이 그가 돌아온 순간을 보았으면 했어요. 그 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셨으면 했습니다.”(p.384)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또다른 존재의 계획 아래 내 뜻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도구,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고 느낀다. (p.117)     

압둘라자크 구르나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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