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Aug 17. 2022

생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

영화 <군다>(빅토르 코사코프스키, 2020)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 <군다(Gunda)>는 어미 돼지 군다의 힘겨운 출산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두운 축사에서 새끼 돼지들이 하나둘 꼬물꼬물 기어 나오고 짚 더미에 파묻힌 가장 나약한 아이까지 어미가 구출하고 나면 관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생명의 탄생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종(種)을 떠나 하나의 경이이며 절로 ‘부모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새끼 돼지들을 키우고 돌볼 ‘책임’이 일부 나에게도 주어진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이후 영화는 93분 동안 일체의 개입이나 해설 없이, 그 흔한 자막이나 배경음악도 없이 관객에게 그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도록 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지켜보는 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좁혀 마치 나도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참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안겨주었다. 누가 목가적이라 했는가. 새끼 돼지들은 농장의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먹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또 협력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어미 군다에게서는 생명을 키우는 일의 고됨과 보람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들의 세세한 삶의 모습이 인간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물의 시선에서 바라본 트랙터는 마치 외계에서 온 침입자의 도구처럼 이질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끊이지 않는 돼지 울음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어미 돼지 군다만큼이나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트랙터와 함께 새끼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나서야 사태가 파악됐다. 그리고 나는 내가 스크린 밖으로 추방되었다는 걸 알았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처럼 동물 세계로부터 아득한 거리로 쫓겨난 것이다. 동질감을 느꼈던 건 역시 착각이었다. 나는 저 트랙터만큼이나 그들에게 이질적이고 폭력적인 존재, 인간이었다.      



   군다의 당혹스러운 눈빛과 몸짓이 나에게 묻는 듯했다. 기계를 끌고 틈입해 들어온 저 인간과 당신은 같은 종(種)이지 않냐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게 설명을 좀 해달라고.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육식을 하는 인간으로서 나도 이 파괴적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거니까. 


   침묵하는 나에겐 새끼를 잃은 어미의 모습을 오래 응시해야 하는 형벌이 내려졌다.  홀로 남겨진 군다는 낮은 울음으로 새끼를 반복해 부르며 이리저리 배회하고 냄새 맡고 축사를 자꾸만 들여다본다. 어미의 불은 젖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해봐도 내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무렴 믿기지 않을 것이다. 이곳이 농장이고, 자신들이 가축이고, 인간의 먹이가 될 운명이라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영화 중간에 카메라가 담았던 소와 닭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농장을 누비는 듯했지만, 울타리가 있었고 그들은 그 끝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영화 <군다>는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 스스로가 인간의 ‘책임’을 묻게 하는 힘이 있다. 광활한 대자연에서 동식물이 자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인지도 모른다. 대지와 햇살과 기후가, 생태계와 자연법칙이, 지구와 우주가 알아서 생명을 키우니까 말이다. 반면에 가축은 인간에게 책임 지워진 생명이다. 이들이 생명이라는 인식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겸허한 자세를 취하게 한다. 비록 최상위 포식자의 습성을 버리진 못하더라도 생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걸 영화가 끝나고 검은 스크린을 마주하며 비로소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 
사람들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한 발짝 멀어지기를 바란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 인터뷰)


영화 <군다>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격랑과 함께 이야기의 파도가 밀려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