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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01. 2022

시대의 울타리를 넘어,
실존적 자아를 향해

J. M. 쿳시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문학동네, 2021)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J. M. 쿳시의 장편소설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문학동네, 2021)는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와 내전이 한창인 시대에 구순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유색인 마이클 K의 삶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1부와 3부는 피식민자인 마이클 K의 입장에서 착취와 멸시의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내지만, 2부는 식민주의의 최전선에서 회의를 품은 채 군의관으로 일하는 백인 화자를 내세워 마이클 K로 대변되는 인간 실존의 문제, 전쟁과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당대의 어둠을 말 그대로 관통해서 걸어간 한 사람의 삶을 다면적으로 조망해 놀랍도록 깊은 사유에 도달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묵직한 울림을 주는 건 마이클 K의 행보다. 케이프타운 시청의 정원사였던 그는 고향인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병든 노모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어머니를 손수레에 태우고 길 위로 나선다. 얼굴 기형과 낮은 지능 때문에 특수 시설에 맡겨져 자란 그는 ‘나는 왜 세상에 나왔을까?’라는 질문에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p.16)라고 스스로 답했던 이다. 험한 여정 중간에 어머니가 죽자 그는 화장한 어머니의 유골을 묻기 위해 혼자서 농장으로 향한다. 집도 직업도 없고, 이동허가증도 신분증도 없던 그는 집단 노동에 끌려가고, 농장에 숨어 농사를 짓다가 산속에도 들어가 숨지만, 결국은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수용소에 갇힌다.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 잊힌 구석’(p.68)에서 조용히 ‘직접 땅에서 거둔 음식을 먹으면서’(p.155) ‘깊이 잠든 대지 위에 찍힌 점 같은 존재’(p.134)로 살고 싶었지만, 시대는 그를 울타리 안에 가두고 그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      


그는 돌멩이 같다. 태초부터 어딘가에 조용히 누워 자기 일만 하다 지금에서야 갑자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아무렇게나 건네지는 조약돌 같다.(p.183)     


    수용소에서 먹고 살기 위해선 원치 않는 노동에 투입되어야 했다. 사회 지배층인 백인들에게 그들은 하인, 노예, 피조물,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 나온 통찰력인지 마이클은 반발도 저항도 소용없음을 알고 ‘먹지 않는 것’을 택한다. 굶주림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사항이었다. 처음엔 “나는 늘 먹을 필요는 없어요. 먹을 게 필요할 때, 일을 할 거예요.”(p.118)라던 그는 서서히 “그건 내게 맞는 음식이 아니에요.”(p.197)라며 수용소의 음식을 전부 거부한다. 이 대목은 카프카의 <단식 광대> 속 예술가가 단식을 선택한 이유를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의 음식 거부 뒤에도 마이클처럼 ‘원칙이 아니라 관념’(p.223)이 있었다. 정직하게 일했음에도 보상해주지 않고 기만하는 세상, 단식은 그 철저한 몰이해에 대한 저항이었다.      


    한편으론, 마이클의 ‘날마다 반복되는 완고한 아니요’(p.224)는 불가해한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거듭 외치던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도 겹쳐진다. 이 같은 관점에서 마이클을 바라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당신이 보여주는 저항의 진가를 깨닫기 시작했어요.’(p.222)라는 백인 군의관의 생각에 십분 동의하게 된다.  마이클은 굶주림을 통해 체제의 일부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한 사람이며, 전쟁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단순한 생존이 아닌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사람이다.     


‘결국 굶주림의 예술은 실존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방법이고, 이때 죽음이란 바로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죽음이다.’
_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p.32)     



    놀랍게도 이후 마이클은 수용소의 울타리를 넘어 탈주를 감행한다. 뼈만 앙상한 몸으로 어릴 적 꿈처럼 울타리를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리곤 여윈 몸으로 또다시 걸어서 이 긴 여정의 출발지였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마이클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는다. 자신이 ‘동정의 대상’(p.244)이 되었다는 아픈 통찰 끝에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정원사였다’(p.245)고 정체성을 깨달은 그는, 마지막으로 ‘동정심으로부터도 탈출할 것’(p.246)이라며 다시 땅을 일구는 삶을 꿈꾼다. 마이클은 생각한다,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은 충분하다’(p.247)고.     


    마이클은 수용소의 ‘마이클스’가 되어 시대의 희생자로 남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그것이 비록 미미한 저항인 단식과 탈주일지라도)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하고 어쩌면 우둔한 일개 개인의 삶이 거대한 시대 속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걸까?’(p.214)라는 의문 속에서 수용소 소장과 군의관이 나눈 다음의 허망하고 모순된 대화가 그 답일 것이다.     


“우리가 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노엘이 말했다. 
“소수자들이 그들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요.”
우리는 허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p.214)               


J.M. 쿳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이미지 출처: 연극 <Life and Times of Michael K>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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