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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25. 2022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의
헤어질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은 이별이 아닌 사랑 이야기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2019)가 실제론 이혼을 그린 영화였던 것과 상반된 설정이지만 의미하는 바는 비슷하다. 이혼도 결국은 결혼에 속하는 과정인 것처럼 이별도 사랑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 헤어질 결심이 성립되려면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서래와 해준은 서로를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다. 비록 그 사랑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정훈희의 ‘안개’처럼 짙은 회한의 정서를 품고 있어도 말이다.  

   



   서래와 해준은 서래 남편(기도수)의 죽음을 계기로 살인 용의자와 담당 형사로 만난다. 첫 심문부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건, 범죄를 밝히고자 하는 욕망과 숨기고자 하는 욕망이 정면에서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자신의 속마음은 감추고 상대의 심중은 파악하려는 사랑의 언어와 닮았다. 여기에서 해준을 함정에 빠뜨리는 건, 중국인인 서래가 사용하는 한국어가 생경한 동시에 우아하기 때문이다. 서래의 대사와 탕웨이 배우의 발음이 합쳐져서 해독하기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언어가 잉태된다. 

    

   서래는 모호한 여자다. 파란색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녀의 청록색 드레스처럼. 해준이 잠복 수사할 때 서래는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담배를 태운다. 이슬만 먹는 숲속의 요정과 뒷골목의 ‘독한’ 요부가 동시에 떠오른다. 순수와 타락 사이에서 ‘단일한’ 좌표를 찍을 수 없는 여자다. 서래가 사랑에 빠진 건지 아니면 살인에 빠진 건지도 불명확하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녀가 갖고 싶은 게 해준의 ‘마음’인지 ‘심장’인지 달라지는 것처럼.     


   해준은 서래의 말에 따르면 ‘품위 있는 남자’다. 해준은 자신의 품위는 형사의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미결사건들을 벽에 붙여놓고 잊지 않는 것도, 현장에서 인공 눈물을 넣어 눈을 씻는 것도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그를 말해준다. 하지만 기도수 사건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의 눈에 서래는 살인 용의자와 무고한 피해자 사이를 수없이 오간다. 피살의 정황보다 자살의 증거가 더 명백하기에 사건은 종결된다. 그제야 서래와 해준은 동등한 위치의 연인이 된다.     


   둘의 관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형사의 감으로 해준은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그날의 전말을 알게 된다. 그의 조력자 형사가 의심했던 대로 서래는 살인자였다. 구소산에서 추락한 기도수가 눈을 부릅뜨고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그곳에 서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에 미쳐 수사를 망쳤다는 충격으로 해준은 품위도, 자부심도 잃고 ‘붕괴’된다. 그리고 서래에게 증거인 핸드폰을 깊은 바다에 버리라며 사건을 덮기로 한다. 해준은 이별을 고하는 말을 서래는 사랑의 고백으로 듣는다. 사랑은 자아를 휘젓는 경험이기에 필시 ‘무너지고 깨어질’ 수밖에 없다. 해준이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서래의 편에 선 것도 모두 사랑이 한 일이고 서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시간은 흘러 무대는 부산에서 이포로 이동한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구조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포개질 정도로 반복된다. 단지 사랑과 붕괴를 통과한 인물들이 조금 더 치밀해졌을 뿐이다. 해준이 서래를 다시 만난 곳은 이포의 수산시장이다. 해준과 그의 부인 정안, 서래와 그의 남편 임호신, 이렇게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저마다의 관심 어린 시선과 의심하는 마음이 충돌하며 긴장감이 흐른다.  

    

   이번에도 서래와 해준은 용의자와 수사관으로 만난다. 이번에 변사체로 발견된 사람은 임호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다. 서래의 두 남편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두고 해준은 서래에게 “거, 참 공교롭네”라고 말한다. 그녀의 주위에서 동일한 불행이 반복된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말일 터. 해준은 본래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고 생각하는 형사였다. (재밌는 건, 이번에 해준의 파트너가 된 형사는 서래가 무고하며 종결된 사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준에게 충고한다는 점이다. 해준과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조력자 형사는 1부와 2부에 똑같이 반복된다.) 반면에 같은 상황을 두고 서래는 “참 불쌍한 여자네.” 한다. 서래가 해준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서래의 고단한 처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어쩌면 서래의 말이 맞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주외국인인 서래에겐 다른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또다시 최악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서래의 말이 아프다. 반듯하고 믿음직스러운 남자는 살인 용의자나 되어야 만날 수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서래의 몸이 ‘꼿꼿한’ 건 늘 긴장하며 살아 온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사를 감각적으로 끌어가는 하나의 장치는 대비다. ‘산’과 ‘바다’가 대표적이다. 1부는 부산(바다)과 구소산을, 2부는 이포(바다)와 호미산을 배경으로 한다. 첫 번째 남편 기도수는 산에서 추락해서 하늘을 바라본 채 죽었다면,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수영장에서 바닥을 본 채 수면에 떠 있었다. ‘추락’과 ‘부양’은 대비되는 이미지다. ‘자살’과 ‘피살’, ‘종결사건’과 ‘미결사건’, ‘용의자’와 ‘무고한 사람’ 등도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필연적인 의심과 운명적인 사랑 사이를 오가다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는 걸 해준이 ‘마침내’ 깨달았을 때, 서래는 이미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바다로 사라진 뒤였다. 상대는 물론 자신의 마음조차 ‘똑바로’ 보지 못했음을 알아버린 해준은 그 순간 정말로 붕괴된다. 만조의 바닷가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면서 해준은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들던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비장미(悲壯美)는 질곡동 사건의 홍산오처럼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의 ‘헤어질 결심’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준은 결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래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사건’으로 남았으리라.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포스터


*<헤어질 결심> 한 줄 평 :

"우아한 미장센으로 관객을 포위한 후 빈틈없는 시나리오로 몰아가 종국에는 완전히 사로잡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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