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제타(1999)>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일자리가 생겼어. 난 일자리가 생겼어. 넌 친구도 생겼어. 난 친구도 생겼어. 넌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난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난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잘 자.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다르덴 형제, 1999)를 보면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2016)가 떠오른 건 아마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로제타가 친구 리케의 집에서 잠을 청하며 혼잣말로 속삭이는 장면이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주문처럼 되뇌는 이 부분에서 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유명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관공서 건물의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시작하는 글을 낙서로 남기는 장면이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면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제타>의 주인공 로제타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십 대 소녀다. 그녀는 일자리가 절박한 상태고 친구는 없으며 평범한 십 대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미 구덩이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을 목수로 일해 온 노년의 인물이다. 그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실직 중이지만 국가로부터 질병 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실업의 문제, 사실상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두 영화가 집중하는 지점은 조금 다르다. <로제타>는 벨기에의 높은 청년 실업률과 사회적 구제 정책의 부재를 비판하고 있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사회보장시스템의 복잡한 절차와 관료주의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가 아예 없는 것도 문제지만, 제도가 있어도 행정 편의 위주로 운영되어 수혜 대상이 외면당한다면 그것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주인공 곁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이 있다. <로제타>의 리케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케이티다. 와플 가게의 남자 직원 리케는 로제타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는 이다.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 하나의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가 된다. 우정도 사랑도 치열한 현실 앞에서 싸늘하게 식는다. 결국 로제타는 더는 삶을 지속할 의미가 없다는 듯 가스 밸브를 열어놓는다. 엄마와 함께 죽으려 했으나 가스가 부족해 그조차 실패했을 때, 훼방꾼 혹은 구원자처럼 멀리서 리케가 다가온다. 몸싸움 끝에 눈물을 터트린 로제타를 리케가 일으켜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뒷이야기는 관객의 몫이지만 제도의 개선 없이는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하긴 힘들어 보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보단 따뜻하게 기억되는 영화다. 아이 둘의 미혼모 케이티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다니엘이었다. 그녀와 아이들은 다니엘의 도움을 받으며 역경의 시간을 헤쳐나간다. 다니엘이 법정 소송에 나설 때 이번엔 케이티가 그의 곁에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다. 비록 다니엘은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승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사망하지만, 잘못된 현실을 바꾸고 존엄을 지키려 했던 다니엘의 투쟁은 케이티에게 삶의 등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두 사람의 용기와 연대가 이 영화에 온기를 더한다.
<로제타>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단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어떤 집단으로 분류되어 타자화되지 않도록 이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존엄성의 문제를 꼬집는 영화다. 관객에게 동정이 아닌 행동을 촉구하는 영화다.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병든 노인들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냥, 사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