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하마구치 류스케, 2021)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갈 때가 있다. 상대에게서 어떤 답이 돌아올지 두려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진실을 맞닥뜨릴 시간을 최대한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상대는 떠났고 진실을 알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면, 그럴 때 우리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드라이브 마이 카>(하마구치 류스케, 2021)에서 주인공 가후쿠는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이다. 그의 아내 오토는 TV 드라마 각본가이고, 영화 초반에 둘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복한 부부로 비친다. 가후쿠의 출장이 하루 지연되면서 오토의 외도를 가후쿠가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 남편으로서 분명 큰 타격을 입었을 사건임에도 가후쿠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고 이후에도 아내를 이전과 똑같이 대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아내의 외도를 모르는 다정한 남편을 연기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부부는 네 살 딸아이를 잃은 아픔에서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 오토가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가후쿠는 추측한다. 하지만 진실은 알지 못한다. 오토가 대화를 하자고 한 날 가후쿠는 아내를 잃게 될까 두려워 일부러 늦게 귀가했기 때문이다. 오토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을 줄은, 그래서 진실을 결코 알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다. 가후쿠는 뒤늦게 ‘하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p.27) 때문에 고통받으며 자책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영화는 2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출가로 일하는 가후쿠의 현재를 보여준다.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에선 딱 한 번 언급된 이 연극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을 관통하는 극중극으로 비중 있게 다룬다. 가후쿠는 오토가 녹음해준 <바냐 아저씨> 카세트테이프를 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듣는다. 나중에 미사키가 가후쿠의 드라이버로 배정된 후에도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요청해 함께 듣는다. 생전에 녹음된 오토의 목소리 사이사이 가후쿠가 바냐의 대사를 읊는 장면은, 마치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동시성’이 제거되어 있어 두 사람의 소통 불능과 오토의 부재를 드러낼 뿐이다.
감독은 여기에 여러 국적의 배우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어) 연기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콘셉트를 통해 ‘소통’이라는 주제를 강화한다. 타인의 언어가 갖는 소통 불가능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소통하려는 노력의 중요성과 드물지만 반짝이는 교감의 순간들을 모두 담아낸 뛰어난 연출이다.
영화에는 제목처럼 드라이브 장면이 자주 나온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인물들 사이에 두 번의 중요한 소통이 이뤄지는데, 하나는 오토의 외도 상대로 추정되는 배우 다카츠키와 가후쿠의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운전을 맡은 미사키와 가후쿠의 대화다.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오토의 ‘빈집털이 소녀’ 이야기의 뒷부분을 알려주며 오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이야기에서 소녀는 첫사랑 소년의 집에 들어온 또 다른 침입자를 살해하는데 이후에 그 집엔 감시카메라가 하나 달렸을 뿐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소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감시카메라에 대고 “내가 죽였어”라고 여러 번 반복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어쩌면 오토는 자신의 외도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유지되는 가정이 위태롭다고 느껴 가후쿠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가후쿠는 후에 오토를 죽인 건 자신이라며 슬퍼한다.
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미사키는 괴로워하는 가후쿠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에 그녀는 산사태로 무너져가는 집에서 엄마를 구조하지 않고 죽도록 방치했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학대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뜻밖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아픔과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비슷한 상처에 괴로워하던 둘은 서로를 안아주며 위로한다.
연극 <바냐 아저씨>가 무대에 오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가후쿠는 오토의 죽음 이후 피했던 바냐 아저씨 역을 승낙하고 미사키는 관객석에 앉아 연극을 본다. 소냐가 바냐 아저씨를 끌어안으며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라는 수어는 마치 가후쿠와 미사키에게 하는 말 같다.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 대사에서 방점은 ‘우리’에 찍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즉 실수하고 자책하고 반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가 세상에서 나 혼자는 아니라는 것 말이다. 그게 얼마간 위안이 되고 남은 생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마스크를 쓴 미사키의 모습은 어쩌면 팬데믹 속에서도 ‘우리’의 힘으로 일상 회복의 기대를 놓지 말자는 감독의 희망 섞인 메시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