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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24. 2022

작품과 현실을 주체로서 끌어안기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미아 한센-러브,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프닝의 경쾌한 타이핑 소리가 작가와 창작에 관한 영화라는 것을 암시한다. 많은 감독이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 영화처럼 현대 여성 작가의 창작욕과 고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영화는 없었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베르히만 아일랜드>(2022)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다. 




영화감독인 토니와 크리스 커플은 각자의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포뢰섬에 도착한다. 포뢰섬은 여러 창작자 사이에서 ‘베르히만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이다.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촬영한 현장이자 생애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섬 곳곳에 거장의 흔적이 유령처럼 떠다니는 곳이다.

      

토니와 크리스의 숙소는 베르히만의 영화 <결혼의 풍경>에 등장했던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열에 들뜬 모습으로 자신의 작업공간을 세팅하는 토니와 달리 크리스는 어쩐지 장소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는 숙소에서 외따로 떨어진 풍차에 작업공간을 마련한다. 크리스는 토니에게 “여기서 글을 쓰면서 어떻게 열등감을 안 느끼지?”라며 베르히만의 존재감에 억눌리는 느낌을 고백한다.    

  

한편으로 크리스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아이 때문에도 마음이 불편하다. “지나치게 좋지 않아?”라는 그녀의 말엔 이 같은 죄책감이 묻어있다. 베르히만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작품 세계와 현실 사이의 균형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베르히만 감독은 생전에 작품에만 몰두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식이 있었고 그중엔 아버지를 보지 못한 자녀도 있다고 했다. 그때 크리스는 모든 여성 창작자를 대변해 질문한다. “작품 세계와 가정을 양립하긴 힘든 걸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여자들은 확실히 그렇게 못하죠.”다.     


사실 크리스는 베르히만 감독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후배 감독으로서 그를 경애하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가 삶의 어두운 면에만 침착하여 그 반대편을 보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가 그녀에게 감동보단 상처를 주는 이유다. 반면에 토니는, 극 중 짧게 등장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추측하건대, 베르히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온화하고 밝은 면’은 없어 보인다. 크리스와 토니는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지만 감독으로서 작품에서 추구하는 바는 많이 달라 보인다.     


시나리오 작업이 술술 풀리는 토니와는 반대로, 크리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이 없어 머뭇거린다. 모든 창작자에게 집필은 ‘고문’이고 ‘피 말리는 짓’이겠지만, 크리스는 더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다. 드레스가 ‘흰색’인지 ‘미색’인지를 섬세하게 구분할 정도로. 크리스가 토니에게 자신의 시나리오 <The White Dress>를 들려주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 이야기로 전환되고 앞에서 보여줬던 장소들을 되짚어가는 식으로 반복과 변주된다.     




크리스는 영화감독인 에이미와 그녀의 전 애인 조디프를 주인공으로 연인의 마지막 장을 쓰고 싶어 한다. ‘실패와 배신과 흥분의 연속이면서 애도할 수도 괴로워할 수도 없는, 가끔 찬란히 행복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장.’ 베르히만 감독의 포뢰섬을 배경으로 그녀는 그가 주목하지 않은 ‘행복’을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엔딩을 찾지 못했다. 토니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조지프가 떠나고 에이미가 무너지는 데서 멈춘다. 

     

토니가 섬을 비운 사흘, 크리스는 현실에서 시나리오 속 환상으로 들어가 마침내 마지막 장을 완성한다. 크리스와 에이미가 묘하게 중첩되면서 영화는 사랑 이야기에서 그것을 찍는 여성 영화감독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막힐 때마다 크리스는 토니의 조언과 격려를 바랐지만, 사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토니의 부재였는지 모른다. 토니의 선글라스 대신 자신의 것을 새로 산 것처럼 기존 남성 감독(베르히만과 토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렌즈를 새로 장착해야 했던 것이다.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에 더해 주체가 되는 법을 터득하기란 무척 어렵고 진 빠지는 일이랍니다.”(<알고 싶지 않은 것들>, p.38) 소설가 데버라 리비가 자전적 에세이에서 한 말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 여성 창작자는 기존 사회가 그에게 부과한 매듭을 풀고 주체가 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자신의 언어를 새로 발굴하고 자신의 영토를 탐험해야 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크리스가 일탈과 방황, 고뇌 끝에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영화의 마지막에 딸 준을 끌어안고 웃는 크리스의 얼굴에 한센-러브 감독의 얼굴이 겹쳐진다. 작품과 현실, 두 세계를 모두 주체로서 끌어안은 이의 찬란한 미소다.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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