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문학동네, 2009)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08:30 그녀는 아침이 늘상 그렇듯 오늘의 시작도 참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도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단지 몇 페이지 안 남기고 책장을 덮은 것이 스스로 의아했을 뿐. 왜 끝까지 읽지 않았던가?
그녀가 읽다 만 책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p.39) 삶의 정해진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한때 잘 나가던 직장인이었던 그는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쳐 늙고 병들어 ‘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p.39)을 향해 가고 있었다. 죽음과 망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옮아왔는지 이상하게 소설이 끝나는 게 두려웠다. 결말을 읽지 않으면 그의 죽음이 유예되기라도 할 것처럼.
08:50 아흔한 살의 그녀는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p.188) 셋방에서 송장을 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집주인 노파의 등쌀에 못 이겨 큰아들이 자신의 집으로 모신 바로 다음 날이었다. 큰아들은 그녀를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에 모시기 위해 아직 젊고 힘센 아들(그녀의 손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큰아들의 아내(그녀의 며느리)는 그동안 쌓인 억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받아들였다. 훗날 이 결정이 큰아들과 그의 아내 모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큰아들을 제외한 다른 자녀들(작은아들과 딸)은 그녀를 모시기를 꺼렸다. 다들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이유야, 찾으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09:30 전화벨이 울렸다. 이렇게 일찍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물기에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덤덤한 목소리로 할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병환이 위중해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알았던 그녀였기에 그 소식이 별로 놀랍진 않았다. 다만 할머니가 자신의 집이 아닌 그녀의 본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이 의외였다. 어머니가 할머니를 받아들이셨다니,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일단 병원으로 옮겨 장례식장이 결정되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아침의 적막 속에서 <에브리맨>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불현듯 소설의 첫 장면이 장례식이었다는 것을, 주인공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우리 모두(에브리맨)의 결말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장례식장 9호실 그녀는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장례식장에 일가친척들이 하나둘 도착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중엔 연락이 뜸했던 이도 있고 그녀의 가족과 반목했던 이도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 젊고 활기에 넘쳤던 이들이 지금은 ‘소멸의 가장자리’(p.37)에 있는 것처럼 보여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년은 ‘전투’(p.149)이자 ‘대학살’(p.162)이라던 소설 속 표현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과거를 이야기했다. 서로가 공유하는 기억과 누군가에겐 다르게 새겨진 기억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장례식장에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걸 기억하는 거’(p.19)가 할 일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혹시 노년의 가장 좋은 순간이란 것이 바로 그것 아닐까 – 어린 시절의 가장 좋았던 순간들을 갈망하는 것?’(p.131)
장례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p.22) 그리고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p.23)
그녀는 어느 쪽이었을까? 솔직히 그녀는 7개월여의 돌봄 노동에 지친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었기에 안도하는 편에 가까웠다. 악독하고 이기적인 시어머니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쁘기도 했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는 치매에 걸린 남편(할아버지)을 며느리에게 떠맡기고 도망갔었다고 들었다. 큰아들에겐 언제나 조건 없는 경제적 지원을 바랐다고도 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녀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그녀의 부모가 심하게 다투는 날엔 대부분의 원인 제공이 할머니였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할머니를 원망했고 그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두 아들처럼,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p.99)는 마음은 아니었다. 욕망과 집착으로 점철된 인생도 결국은 소멸하고 만다는 엄정한 현실을 깨닫자 미움보다는 연민의 마음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성남 화장터 아침 일찍 발인을 하고 화장터로 향했다. 예약한 시간에 도착했지만, 버스 안에서 한참을 대기해야 했다. 사람이, 죽은 사람이 많았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p.23)
마침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열 살 소년으로 돌아가 “엄마, 엄마”라고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눈에 눈물이 맺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딸이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던 말을 속으로 외쳤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p.13)
그녀의 할머니는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p.188) 화장터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 그들의 몸이 차지하던 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평생에 걸쳐 유지되었던 그들의 실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p.61)
칠장사 그녀의 가족은 할머니의 위패를 절에 모셨다. 그녀는 문득 죽음을 앞두고 할머니가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궁금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p.175)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었어!”(p.171)였을까? 아니면 ‘오로지, 마침내 고통이 끝나는구나.’(p.170)였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집 모든 일을 치르고 집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마치 오래 떠나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겪은 일이 그녀가 읽은 소설과 뒤섞이며 마치 인생의 처음과 끝을 다 겪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p.130) 그녀는 자신에게도 아흔한 살의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필멸의 존재임을 인정하고 죽음을 가정하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삶과 책이 이처럼 가깝게 달라붙는 경험은 처음이라고, 이 책은 아무래도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