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Jul 24. 2023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김애란 <입동>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이들의 비참한 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니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 앞에 서면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애써 눈물을 참고 손이라도 잡으며 작은 온기라도 전해보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 상실의 대상이 어린 자녀고 위로를 건네야 할 사람이 슬픔에 빠진 부모라면, 나는 상상만으로도 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을 부모의 무력감과 삶의 공허함을 나는 어떻게 대면하고 위로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대성당>>, 문학동네, 2007)에서 여덟 살 ‘스코티’는 생일날 아침 뺑소니 사고를 당한다. 이후 병원에서 ‘충격에 의한 가벼운 뇌진탕’이라는 진단을 받은 아이는 어쩐 일인지 며칠을 혼수상태로 보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곧 깨어날 거라던 의사의 장담을 믿었던 아이의 부모 앤과 하워드는 그사이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리는 정체불명의 전화가 이들의 고통을 가중했다.      


   대뜸 “스코티 일은 잊어버리셨소?”(p.111)라고 외치는 전화 상대는 사실은 앤이 아들 생일에 맞춰 케이크를 주문한 빵집의 주인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허접한 용모와 퉁명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앤은 남편과 함께 빵집을 찾아가 울분을 토한다. 스코티는 죽었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그깟 케이크 때문에 전화질을 하는 건 “너무해도 정말 너무하잖아”(p.125)라고. 그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도, 당신을 죽이고 싶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 소설이 놀라운 경지로 도약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사연을 몰랐던 빵집 주인의 입장에선 앤과 하워드의 몰아붙임이 억울할 수도 있는데도 그는 정중하게 진심을 담아 사과를 건넨다. “내게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당신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간신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라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것뿐이라오.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p.126) 그리곤 그는 앤과 하워드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p.127)라며 갓 구운 롤빵과 커피를 권한다. 그는 지친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 삶의 외로움과 중년을 지나면서 찾아온 의심과 한계, 그리고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에 대해 – 들려준다. 대화와 공감으로 오해는 풀리고 서로의 아픔에 이해가 닿으면서 작지만 따뜻한 위안이 찾아온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 <입동>(2014)의 상황은 비슷한 듯 다르다. 오십이 개월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량에 치여 숨졌다. 봄에 아이를 잃은 부부는 11월인 지금도 여전히 슬픔 속에 살고 있다. 두 소설 모두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이지만, <입동>의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사고를 낸 어린이집은 보험사를 통해 서둘러 사고를 수습했고, 부부는 사무적인 얼굴과 관습적인 문구만 접했을 뿐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어린이집은 이 가정에 추석 선물이라며 복분자를 ‘잘못’ 보내기까지 한다.      


   카버의 빵집 주인이 상황에 대한 ‘무지’로 주인공들을 괴롭혔다면, <입동>의 어린이집이 보낸 복분자는 ‘무심’의 극치다. 둘 다 악의는 없었겠지만, 피해를 입은 쪽은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그러나 몰랐다는 건 진심 어린 사죄가 이어진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알면서도 무신경해서 저지른 일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무감할 수 있느냐며’(p.25) 화를 냈고, 하필 그 복분자가 폭발해 벽에 검붉은 얼룩을 남겼을 때는 “다 엉망이 돼버렸잖아.”(p.12)라며 서글픈 비명을 질렀다.   

   

   부부에겐 제대로 용서를 구하는 이도, 마음이 담긴 위로를 건네는 이도 없었다. 처음엔 안타까워했던 이웃들도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p.36) 이들을 피했다. 두 사람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더해 주변의 외면과 고립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어렵게 도배를 결행한 날, 삶의 아픈 얼룩을 지우고 이제 막 일어서려는 참에 부부는 테이블 아래 가려져 있던 벽에서 아이의 낙서를 발견한다. 이름에서 아직 성과 이응밖에 쓰지 못한 낙서를.      


   김애란의 소설에는 카버의 소설이 안겨준 것 같은 위안은 없다. 스스로 떨쳐 일어난 부부를 이내 주저앉힌다. 도배지를 든 채 남편은 벌서듯 서서 울고, 아내는 낙서 앞에 쪼그려 앉아 운다. 그리고 저자는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p.36)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했던 비난의 말을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p.37)라고 되뇌는 부부의 모습엔 이해받지 못해서 위로받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들이 겹쳐진다.     




   두 소설에서 가장 큰 차이는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비극을 겪은 사람을 낙인찍어 멀리하거나 슬픔을 극복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무신경한 말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고 진솔한 마음을 전하려 애쓰는 것,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고통을 섣불리 안다고 하지 않고 다만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상실의 슬픔을 견디는 이들에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수록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김애란 <<바깥은 여름>> 수록 단편 <입동>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이룬 꿈의 ‘처음’을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