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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06.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맞서 싸울 용기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미야케 쇼,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애써 웃음 짓던 케이코의 얼굴이 영화가 끝나고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케이코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처음으로 돌려 보니, 케이코가 체육관 회장님께 ‘당분간 쉬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내 ‘복싱을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힘겨운 시기를 보낸 것이다. 그녀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으니(케이코는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선천성 청각장애인이다) 그 심정을 짐작이라도 하고 싶으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기어코 내게서도 눈물이 터졌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주인공 케이코는 프로 복서이다. 복싱에서 청각 장애는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주심의 목소리는 물론 공이 울리는 소리도, 코치의 지시도 듣지 못한다. 상대 선수의 반칙에 말로 항의하지도 못한다. 케이코의 장점은 눈이 좋다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결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실일 것이다. 한편으론 복싱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생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도 불리하다. 케이코는 낮에는 호텔 객실 청소 일을 하면서 새벽 달리기와 저녁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그녀의 일지가 성실함은 물론 정직함과 솔직함이라는 그녀의 인간적인 기량을 증명하지만, 복싱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케이코가 훈련하는 체육관이 재개발로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체육관 회장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한다. 그녀를 위해 다른 체육관을 알아봐 주지만, 그것조차 그녀는 불편하다. 그녀의 성과보다 그녀의 장애가 우선 고려되는 상황에서 폐를 끼치는 것도 같고 짐이 된 것도 같았을 테다.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싱을 둘러싼 모든 일이 그녀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는 것 같다.     


 

   어쩌면 케이코는 “왜 나에게만”이라는 생각으로 괴로웠는지 모른다.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에 삶이 부당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부담감, 부상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조금씩 쌓여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여러 불리한 조건들은 복싱을 포기할 명분이 되기도 했을 테다. 프로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엄마의 말을 자기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테다.      


      케이코가 라이벌 선수를 우연히 마주친 건, 이런 복잡한 심경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녀는 얼마 전 시합에서 케이코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다. “저번 시합 때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엔 상처가 여전한데, 자세히 보니 건설노동자 복장에 안전모를 손에 들고 있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생각에 잠긴 케이코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그리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복싱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어. 싸울 마음이 사라지면 상대에게도 실례야. 위험하니까.” 언젠가 체육관 회장님이 한 말이 그 순간 케이코의 머리에 떠올랐을 것 같다. 케이코의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않은 채 다시 맞서 싸워볼 용기를 내는 듯한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라이벌 선수의 삶을 살짝 엿보게 된 일이 어쩌면 케이코에게 삶이 나에게만 불공평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선수들도 저마다의 불리함을 끌어안고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케이코가 자신의 두려움과 취약성을 인정하면서도 복싱을 계속하기로 선택한 것은 ‘성공의 확률로 내 노력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던 정치철학자 조슈아 데인스타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실패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작은 빗방울이 오랜 시간 동안 단단한 돌을 뚫듯, 처음에는 작아도 조금씩 느리지만 착실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 이 대사는 병의 진전과 인간의 쇠퇴에 대한 언급이지만 성장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Small, Slow But Steady>가 영화의 영문 제목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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