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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09. 2023

실존적 위기가 불러온 작은 내전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활한 바다로 둘러싸인 고요하고 한적한 아일랜드의 외딴섬. 신화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민속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며 영화는 시작한다. 파우릭(콜린 파렐)은 오늘도 어김없이 낮 2시 펍에서의 친교 시간을 위해 콜름(브렌단 글리슨)의 집으로 향한다. 파우릭의 몇 차례 부름에도 콜름은 이상하게 응답이 없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펍에서도 이어지고 급기야 콜름은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라며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오랜 절친의 갑작스러운 절교와 이후 파행으로 치닫는 관계. 의미심장하게도 같은 시각 아일랜드 본토에선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가상의 섬 ‘이니셰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두 친구의 절교라는 사소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은유하는 동시에 인간 실존을 향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콜름이 작곡한 바이올린곡의 제목이기도 한 ‘이니셰린의 밴시’의 ‘밴시’는 켈트 신화에서 가족의 죽음을 울어서 예언하는 요정을 뜻한다. 초반부터 강렬한 충격을 안겨준 영화는 맥코믹 부인으로 분한 밴시가 예견하는 ‘두 개의 죽음’으로 끝까지 긴장감을 이어간다. 절교가 죽음까지 부를 일인가 싶지만, 극이 전개됨에 따라 두 사람이 벌이는 일의 양상은 내전을 닮아간다.*   

  

   절교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파우릭은 거듭해서 콜름을 찾아가고, 콜름은 자꾸 말을 걸면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실제로 손가락을 하나 잘라 파우릭의 집 대문에 투척한다. 이들의 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결국 콜름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모두 잃게 되고 파우릭의 자식 같은 당나귀 제니가 이 손가락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무고한 희생은 보복으로 이어져 파우릭은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이른다. 섬뜩하고 폭력적인 전개에 관객은 영화 초반 총성이 울리는 본토를 바라보며 파우릭이 낮게 읊조렸던 말을 이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어진다. “행운을 빈다. 뭣 때문에 싸우든지 간에.”   


   

   사실 파우릭과 콜름의 갈등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콜름은 불현듯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인생을 작곡에 바치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콜름은 죽음 앞에서 영원(예술적 성취)을 바라는 자다. 반면에 파우릭은 삶에서 다정함(인간관계)을 구하는 자다. 콜름은 둘 사이의 대화를 ‘지루하고 무의미한 수다’라고 하지만, 파우릭은 ‘즐겁고 평범한 수다’라고 정정한다. 그러면 파우릭과의 관계 단절을 통해 콜름은 비범한 성취를 이루었을까? 파우릭은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다정함이라는 신념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콜름과 파우릭이 해변에서 나누는 대화는 화해인지 아니면 앙금에 대한 암시인지 모호하다.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내전이 끝나가는 것 같다고 다정히 말을 거는 콜름에게 파우릭은 분명 조만간 다시 시작할 거라며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들도 있는 거니까.”라고 냉정한 말투로 말한다. 파우릭과 콜름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각성해 서로를 일부 닮아간 듯하다. 여전히 내전의 내상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이들의 불화도 쉽사리 해결되진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파우릭이 ‘콜름에게 남은 유일한 다정함’인 개를 살려주고 보살핀 것은 다행이다. ‘눈에는 눈’이라며 무고한 희생을 반복하지 않은 것, 둘 사이의 관계 회복의 희망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파우릭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콜름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허밍으로 부른다. 이 장면은 그의 예술이 영원은커녕 자기만의 성취로 남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곡을 완성했어도 예술가의 좌절감은 돌아왔기에 그가 손가락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때 그는 예술가의 짐을 내려놓고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홀가분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평화롭고 웅장한 아일랜드의 자연이 거칠고 미약한 인간사를 압도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두 개의 죽음 중 하나는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였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죽음은 누구에게로 갔을까? 영화에서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은 외로움을 호소하다가 이니셰린을 떠난다. 어쩌면 그녀가 이니셰린에 머물렀다면 ‘죽을 때까지 느리게 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섬에서 가장 멍청하다고 불렸던 어린 도미닉이 희생됐다. 그러고 보면 도미닉이야말로 이니셰린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던 외로운 존재였다. 없는 것보다 못한 가족(권위적인 경찰로 학대를 일삼는 아빠), 마을 사람들의 외면, 유일하게 의지했던 파우릭에 대한 실망, 시오반의 데이트 거절까지. 파우릭과 콜름의 작은 내전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을 때, 다정함을 필요로 했던 도미닉은 쓸쓸하게 죽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은유와 상징, 유머와 성찰, 무수한 질문을 내포한 잘 짜인 각본과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 카메라에 담긴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풍광과 거룩하고 성스러운 배경음악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영화였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한 편이다.                                         

    

*아일랜드 내전은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찬성하는 자유국과 반대하는 IRA 사이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이다. 어제까지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섰던 동료이자 이웃이 하루아침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어느덧 전쟁은 명분과 이유는 사라지고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다 결국 자유국에 의해 IRA가 괴멸하고 나서야 끝난다. 어제까진 절친이었던 사이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절교를 선언하고 폭력적인 행태를 벌이고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이 발생해 보복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파우릭과 콜름 사이에 벌어진 일은 내전과 닮았다. 


<이니셰린의 밴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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