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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30. 2023

뒤집힌 삼각형에도 꼭짓점은 있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루벤 외스틀룬드,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처음 들었을 때 영화의 제목이 참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영화는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 인간 본성을 신랄하게 풍자한 블랙코미디였다. 서양판 <기생충>(봉준호, 2019)이라고도 평하는데, 젠더와 인종, 미디어 신(新)인류 등이 끼어들어 계급의 양상이 더욱 복잡하고 무인도 표류라는 재난 상황을 통해 대대적인 전복을 꾀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수작이지만 불쾌감을 부르는 몇몇 장면 때문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구토 장면 때문에 한 번은 보아도 다시 돌려보기는 꺼려지는 영화였다.   




   1부 ‘칼과 야야’, 2부 ‘요트’, 3부 ‘섬’. 이렇게 총 3부로 구성된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표현은 에필로그 격인 패션모델 선발 장면에서 일찌감치 나온다. 오디션에 참가한 남성 모델 ‘칼’은 슬픔의 삼각형, 즉 눈썹과 눈썹 사이 우리가 ‘미간’이라고 부르는 부위의 주름을 펴보라는 지시를 받는다. 앞서 그는 요청에 따라 발렌시아가 포즈(소비자를 내려다보는 듯한 도도한 표정)와 H&M 포즈(피부색이 달라도 우리는 친구라는 밝은 표정)를 번갈아 취해야 했다. 이 장면은 이들이 표정과 감정까지도 통제당하는 패션계의 약자라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노골적인 상업성을 풍자한다.


   아직 모델계에서 인지도가 낮은 ‘칼’과 달리 그의 여자친구 ‘야야’는 패션쇼 런웨이의 첫 주자로 나설 만큼 잘 나가는 모델이다. 1부는 두 연인의 사회적 위상의 차이에서 비롯한 금전적인 다툼(데이트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가)이 젠더 갈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칼’은 벌이가 적더라도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이 불만이고, ‘야야’는 별것도 아닌 일로 끝없이 논쟁하는 그의 쪼잔함에 진저리 친다. 사실 ‘야야’에게는 현재는 남성 모델보다 대우가 좋을지 몰라도 은퇴 후에는 ‘트로피 와이프’로 전락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라는 영향력 있는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다. 이들은 극적으로 화해하고 연출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한다.     


   2부는 초호화 크루즈를 배경으로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칼’과 ‘야야’는 인플루언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탑승했지만, 둘을 제외한 나머지 승객은 모두 부유층이다. 이들은 베블런의 ‘유한계급(leisure class)’, 즉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은 인간 집단’에 가깝다. 반면에 크루즈의 직원들은 서비스 노동을 해야 하는 ‘생산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청소나 엔진룸 관리 등을 담당하는 이들은 유색 인종으로 최하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승객들이 종업원들에게 역할 놀이를 시킨다거나 반강제로 수영을 하게 하는 장면은 유한계급의 ‘과시적 여가’의 단면을 보여주고, 흔들리는 배 안에서의 호화로운 만찬 장면은 ‘과시적 소비(산해진미)’와 '재화의 낭비(구토)'를 보여준다(구토를 하면서도 물이 아닌 샴페인을 찾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일부러 과장되게 연출한 이 장면은 산해진미를 쌓아 놓고,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던 로마 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을 태운 크루즈는 폭풍우, 만취한 선장과 승객의 만행, 해적이 던진 수류탄에 의해 좌초한다. 수류탄이 하필이면 크루즈 탑승 승객 중 한 명이 제조 판매한 무기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이후 ‘칼’과 ‘야야’ 커플을 비롯해 소수의 인원만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3부 ‘섬’은 원시 환경 속에서 이들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을 그렸다. 생존에 유리한 능력을 갖춘 인물(물고기를 잡을 줄 알고 불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 새롭게 권력의 왕좌(‘캡틴’)에 앉는다. 바로 ‘애비게일’. 그녀는 크루즈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던 아시아계 여성이다. 이 같은 계층의 전복은 관객에게 일시적인 통쾌함을 안겨주지만, 이내 그녀가 무력한 인간들 위에 군림하면서 다시 불편해진다. 특히 ‘칼’을 구명정 안 침실로 이끄는 장면은 술탄이 하렘을 구축한 것처럼 느껴졌다.  

    

   ‘슬픔의 삼각형’이라 부르는 미간은 형태적으로 거꾸로 된 삼각형이다. 영화 속에서 계층과 권력의 피라미드가 전복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뒤집힌 삼각형에도 꼭짓점은 존재한다. 삼각형이 원형이나 평평한 다른 도형으로 변하는 법은 없다는 게, 슬픈 진실이다. 세상이 뒤집혀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는 이가 바뀔 뿐, 지배-피지배, 착취-피착취의 역사는 계속된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동등하다(equal)'는 개념은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이상이다.      


   마지막에 영화는 지금까지 무인도로 여겼던 곳이 알고 보니 리조트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다. 세상의 어떤 외딴곳에도 자본이 흘러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인 듯하다. 한순간에 권력을 잃을 위기에 놓인 ‘애비게일’은 리조트의 비밀을 알게 된 ‘야야’를 뒤에서 공격하려 하고, ‘야야’는 ‘애비게일’ 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사회로 돌아가면 자신의 비서로 고용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삼각형이 다시 한번 뒤집히려는 순간에 카메라는 이들을 향해 달려오는 ‘칼’의 모습을 비춘다. ‘칼’의 질주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야야’를 향한 뒤늦은 사랑의 자각일까, 아니면 ‘애비게일’이라는 권력자를 향한 충성과 노예근성의 발현일까?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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