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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23. 2023

유대인, 과거의 피해자에서 현재의 가해자로

데어라 혼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엘리, 2023)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살아 있는 유대인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p.27)     

   

   이 책은 강렬한 제목이 암시하듯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죽은 유대인은 '숭배'하면서 동시대의 살아 있는 유대인은 '혐오'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가 이러한 논쟁에 착하게 된 계기는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일하던 어느 유대인 직원에게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의 고용주는 정치적인 중립성을 언급하며 그에게 유대인의 표시인 야물커를 야구모자 속에 안 보이게 쓰라고 지시했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 안네 프랑크를 기리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숨기라고 강요한 것이다. ‘안네 프랑크의 집’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로 방문하는 장소다. 저자는 이것을 ‘유대인은 박해받은 피해자로서 존재할 때만 사랑받는다’라는 주장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녀는 <안네의 일기>에서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장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심리가 드러난다고도 말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희생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이 사람들에게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p.36)과 ‘죄사함’(p.37)의 위안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홀로코스트 소설이나 영화를 살펴보면 아무리 거대한 비극이라도 마지막에는 ‘희망을 주는’(p.139)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지적한다. 저자는 이것이 ‘죽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집착’에 내재된 심리적 기제이며, 이처럼 죽은 이들의 ‘피해자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거듭 소비하는 행태는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모욕’(p.24)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말미에 수록된 정희진 여성학자의 해설처럼 ‘타자화 방식 중 죽은 자를 숭배하는 측면’(p.354)과 그 모순을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새로웠고,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지배 문화가 어떻게 활용하는지’(p.351)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의미 있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대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 책과 관련해서 정희진 여성학자가 언급한, 일본의 정치철학자 하시가와 분조의 ‘죽은 아이’와 ‘아이의 죽음’의 차이도 인상적이었다. 정치적으로 ‘죽은 아이’보다 ‘아이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아이를 상실한 부모의 슬픔보다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중대한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인간의 죽음을 '~주의'에 이용하는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피해자의 인권보다 죽은 피해자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사람들이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이유다.’(p.351)     


   그러나 ‘이•팔 전쟁’의 참혹한 양상을 매일같이 목도하고 있는 이 시점에,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과 학살은 하루 이틀 진행된 일이 아니다. 고립 통치되고 있던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이 세운 ‘게토’(예전에 법으로 강제한 유대인 거주 지역)나 다름없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내린 민간인 대피 명령(‘즉시 집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메시지)도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강제 이주’이자 ‘전쟁범죄’로 봐야 한다(얀 에겔란트, 노르웨이 난민위원회 사무총장). 유대인들이 과거의 대학살 ‘피해자’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현재의 ‘가해자’ 위치는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현실은 분노를 부른다. 유대인을 향한 혐오와 테러는 거듭해서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타민족, 타종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은 침묵하는 저자의 태도가 과연 공정한가 의문이다.


   또한 엄밀히 따지고 보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영화에서 끊임없이 재현해 죽은 유대인 숭배를 조장한 건 할리우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유대인들 자신이다.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의 유대인을 '소수자' '사회적 약자'라고 정의하는데,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쟁취한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위상, 자본의 힘 등을 따지면 특권층과 기득권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강대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위상도 마찬가지다.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점차 가자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인 추방과 이스라엘의 점거라는 시오니즘(유대민족주의)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죽은 유대인을 넘어 살아 있는 유대인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건 지독한 자기애(민족애)의 발현이 아닐까.  


         

데어라 혼,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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