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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16. 2023

권력과 사랑에 대한 사유

정찬의 <얼음의 집>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이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는 것, 신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얇은 종이를 통해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더없는 안온함을 주었다.(p.134) 


역사적 비극을 소설을 통해 접할 때 독자는 가끔 이런 느낌을 받는다. 고통의 현장으로부터 나는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안전하다는 생각이거나 혹은 그때와는 다른,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일 테다.  하지만 어떤 소설은 단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응시하게 하며 더불어 현재를 성찰하게 한다. 정찬의 소설집 <<완전한 행복>>(문학과지성사, 1992)에 실린 <얼음의 집>이 그랬다. 


‘역사를 응시한다는 것은 희생자의 끊임없는 행렬과의 마주침’(p.240)이라는 소설 속 표현처럼 일제 강점기 재일한인의 노동력 착취와 박해, 관동대지진 이후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 박열과 후미코의 대역 사건, 전두환 정권 말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다룬 이 소설은 읽기에 무척 괴로웠다. 묵직한 주제와 작가의 사유는 따라가기에 벅찼고 소설을 거듭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정희진 작가는 고도로 추상적인 정찬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의 글에서 현실을 추출해야 하는, 생각하는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신판 발문, p.266)고 말한다. 그의 조언에 따라 어렵고 괴롭지만 소설을 깊이 읽고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Ⅰ. 권력과 사랑의 차이

작가는 권력과 사랑을 대척점에 놓고 있다. 작가는 소설 속 ‘나’의 스승이자 고문 기술자인 하야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권력의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p.167) 권력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남음, 그것도 ‘홀로 살아남음’(p.168)이며, 이것이 ‘선택을 받은 자’(p.168)라는 존재의 우월감과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소설 속 ‘나’가 조선인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느낀 황홀은 권력을 향한 불이었다. 천황 암살을 기도한 것도 권력자를 향해 치솟는 ‘나’의 놀라운 도약이었으며, 폭력을 통한 권력 추구였다.     


반면에 ‘사랑은 권력의 욕망이 제거된 정신이다.’(p.167) 소설에서 박열과 후미코, 정준영은 ‘나’와는 반대로 사랑에 기반한 참된 혁명가로 그려진다. 혁명은 권력의 파괴가 목적이며 혁명 속에는 ‘사랑’,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p.171)이 있다. 천황 암살 기도라는 행위도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박열과 후미코, 정준영은 사랑에 사로잡혀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면 ‘나’는 단지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혀 ‘불꽃 같은 황홀’(p.170)을 맛본 것이다. ‘나’에겐 분노만 있었을 뿐 한 치의 사랑도 없었다.    

 

작가는 이 ‘권력과 사랑의 차이’(p.242)라는 논점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까지 끌어온다. 권력가로서 천황에까지 닿는 더없이 높은 ‘황금사다리’와 장려한 ‘얼음의 집’을 지었던 하야시는 아들을 향한 한 올의 사랑 때문에 삶을 포기한다. ‘살아남음’이라는 권력가의 유일한 목적을 버린 것이다. 그는 후계자인 ‘나’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것은 ‘사랑의 얼굴로 변신한 권력이었다’(p.238)고 고백한다. 혈연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어떤 것이 권력의 자세인지, 사랑의 자세인지 다시금 사유하게 하는 지점이다.      


Ⅱ. 권력의 도구와 책임 회피

대일본 제국 최고의 고문 기술자인 하야시는 ‘나’에게 고문 기술을 전수하면서 자신은 ‘권력의 도구’(p.194)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야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고문 대상자를 생명체가 아닌 사물로 인식하는 훈련을 통해 그들의 전락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쾌락을 지우는 자는 권력의 운명, 즉 피해자의 상처와 증오가 쌓이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권력자의 가슴속에 쾌락이 한 겹 쌓일 때 권력 대상자의 상처와 증오가 한 겹 쌓인다. 쾌락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쌓이지만 상처와 증오는 소리 없이 쌓인다. 새벽에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p.190) 


박해받은 자의 상처와 증오는 궁극적으로는 권력자에게 닿을지 몰라도 눈앞의 고문 기술자에게도 향할 것이다. 하야시의 주장은 그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살을 주관했음에도 자신은 지시 사항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답했던 아이히만. 그의 위험한 신념과 자기 합리화, 책임 회피가 이 소설의 하야시와 맞닿아있다. 소리 없이 쌓인 상처와 증오는 결국 그들을 역사(시간)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세웠다.

      

Ⅲ. 시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권력자

‘나’는 천황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스승 하야시라면 ‘시간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라고 감탄하지 않았을까’(p.228) 상상한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이라도 시간 앞에선 소멸의 길을 걸을 뿐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언한다. 일본의 천민인 에타에서 권력가에 오른 하야시도 필멸의 존재임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견고한 듯했던 얼음의 집도 결국은 녹아 사라졌다. 권력은 순간의 황홀한 불꽃일지 몰라도 허망한 재로 남는다.      


하지만 사랑은 어떤가. 박열과 후미코의 삶과 사랑은 책으로 영화로 후대까지 전해진다. 이들이 추구했던 혁명 정신도 인간과 세계를 향한 사랑과 함께 우리를 뜨겁게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남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작가는 고문 기술자인 화자가 ‘얼음의 집’을 완성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섬뜩한 결말을 썼지만, 실상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과 세계를 향한 순수한 사랑, 즉 ‘완전한 영혼’(단편집의 첫 번째 수록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완전한 영혼> 정찬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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