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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Dec 23. 2023

계층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차등 분배된다면

하오징팡의 <접는 도시>(글항아리, 2018)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인구 과밀과 빈부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안이 하나 제안된다. 하나의 도시를 ‘접어서’ 세 개의 공간으로 만들고 각각의 공간에 시간을 차등 분배하는 것. 도시는 24시간을 기점으로 접혔다가 펼쳐지고, 한쪽의 사람들이 생활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잠이 든다. 어떤가, 다소 과격하지만 기발하지 않은가?     


전환이 시작되었다. 전환은 24시간 주기로 실행된다. 지금이 바로 시간을 분할하여 사용하는 공간 전환 시점이다. 세상이 뒤집힌다. (p.19)




   하오징팡의 SF소설 <접는 도시>는 미래의 베이징이 배경이다. 베이징 당국은 도시로 점점 몰려드는 인구와 치솟는 실업률, 인플레이션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접는 도시’를 설계 시행한다. 도시는 24시간 주기로 ‘전환’된다. 전환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다. 땅이 뒤집힐 때 기존의 건물은 큐브 형태로 압축되어 땅속으로 꺼지고 다른 건물이 솟는다. 기존 공간의 사람들은 캡슐 속으로 들어가 최면 가스로 잠이 들고 동시에 반대쪽 사람들이 깨어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지의 한쪽 면은 온전하게 제1공간이며 상류층(500만 명)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시간은 24시간으로 아침 6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다. 반대쪽은 중산층(2500만 명)과 하층민(5000만 명)이 나누어 쓰는 제2공간과 제3공간이다. 제2공간은 둘째 날의 아침 6시부터 밤 10시의 16시간이 할당되고, 제3공간은 밤 10시부터 그다음 날의 아침 6시까지를 산다. 그러니까 인구가 가장 많은 하층계급은 오직 8시간, 그것도 밤에만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대다수는 쓰레기 처리공이며, 제1공간과 제2공간의 생활 폐기물을 처리한다. 소설에선 이러한 도시 설계를 간단히 ‘각 공간의 할당 시간은 심혈을 기울여 최선의 방식으로 분배되었다.’(p.22)는 한 줄로 설명한다.     


   주인공 라오다오는 제3공간의 쓰레기 처리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접는 도시 베이징을 건설할 때 힘을 보탠 건설 인부이지만 말년엔 쓰레기 처리공으로 일했다. 라오다오는 제3공간에서만 자랐기에 쓰레기 처리공이라는 직업과 8시간 깨어있고 40시간 잠드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쓰레기 운반로에서 제2공간으로부터 온 쪽지를 한 장 발견하고 큰돈을 벌기 위해 공간을 넘나드는 위험에 뛰어든다. 전환이 이루어질 때 라오다오는 잠들기를 거부하고 쓰레기 운반로를 통해 제2공간으로 가서 의뢰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쪽지를 제1공간의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번엔 대지가 뒤집히고 도시가 접히는 와중에 이동한다. 건물 그늘에 숨어 움직이고, 외벽에도 매달리고, 갈라진 틈도 뛰어넘으며 스펙터클한 모험을 강행한다.  

   

   공간과 공간을 오가며 그는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게 된다. 계층 간 엄청난 급여의 차이, 생활 수준의 격차, 온갖 차별과 불평등... 도시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다는 ‘접는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였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마저도 차등적으로 누리는 사회. 게다가 계층 간 공간을 철저히 분리해서 애초에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 세상. 라오다오가 ‘접는 도시 50주년 행사’ 자리에서 엿들은 제1공간 관리들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서구권에서는 개인의 노동시간을 강제로 줄여서 일자리를 늘렸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활력이 없어. 알겠나? 제일 좋은 방법은 어떤 사람들의 생활시간을 철저히 줄이고, 그런 다음 그들에게 할 일을 찾아주는 것이었지. 이해하겠나? 밤 시간에 사람들을 몰아넣었다는 말이야. 이 방법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뭘까? 인플레이션 상황이 사회 하층계급 사람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야."(p.56-57)    

  

   소설은 임무를 마치고 제3공간으로 돌아온 라오다오가 아마도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아가야 할 아이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탕탕은 그의 아이는 아니지만 그에겐 희망 같은 존재다. 금지된 공간 간 이동을 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했던 건 이 아이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탕탕을 위해 세상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지 않을까? 이번 일로 당연한 줄 알았던 삶의 조건들이 계층 간의 불평등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작가가 장편소설의 첫 장을 생각하고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더 전개될 것 같은 상황에서 질문을 가득 던진 채 아쉽게 끝난다. 하지만 발상 자체가 충격적이고 전개가 흥미진진해서 훗날 장편으로 완성된다면 한 편의 영화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접는 도시>로 작가 하오징팡은 SF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그의 중단편집 <<고독 깊은 곳>>(글항아리, 2018)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이 책의 서문에서 'SF소설을 쓰는 것은 가능성의 세계를 구상하고 그 세계의 끄트머리에 인물을 세워놓는 일이다. 그때 가장 쉽게 느끼게 되는 것은 탄생과 소외라는 감각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소설이 상상한 ‘접는 도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불공평한 분배, 불평등한 삶을 당연시하는 현실 세계를 빗대어 탄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어딘가 소외되고 고독한 인물들은 현실의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오징팡, <고독 깊은 곳>(글항아리, 2018)




*이미지 출처: 미드저니(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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