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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02. 2019

변신보다 슬픈 것은
변심이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필수 불가결한 질문을 남긴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이라면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를 묻게 되듯, 소설 <변신>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그레고르는 왜 하필 벌레로 변신한 것일까?’ 한 번쯤 궁금해진다.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민음사, 1988)>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한 마리 흉측한 해충(p.9)’으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그가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안타까워하지만, 이내 그가 영영 노동력을 상실하여 더 이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진짜 벌레 취급을 한다. 유일하게 그를 돌보았던 여동생조차 그레고르의 돌발 행동이 가족들의 새로운 수입원이었던 하숙인들을 내쫓는 결과를 초래하자 돌변한다. 결국 그레고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p.73)’하며 죽어가지만, 가족들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이사를 계획하고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레고르가 하필이면 ‘벌레’로 변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크기는 사람만 하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어 소통조차 단절된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 데는 어떤 내밀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이 고달플 때 누구나 한 번쯤 아침에 눈뜨면 다른 삶이 펼쳐지기를 꿈꿔본다. 그레고르는 무의식 중에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는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그들과 단절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부모가 진 빚을 홀로 갚으며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지난 5년이 '벌레만도 못한 삶'이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차라리 벌레가 되어 그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후에도 가족의 문제를 예전과 똑같이 자신이 떠맡겠다는 생각을 하고, 누이동생 그레테를 음악 학교에 보내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반면에 그의 가족들은 그가 한때 식구였다는 사실, 아들이자 오빠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p.70)


가족 중 누구도 그가 느끼는 고통 - 가족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 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마음은 냉정하게 변한다.


신체는 변했으나 마음만은 한결같았던 그레고르는 변심한 가족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허망하고 외로웠을까? 소설의 결말에서 그레고르와 가족들의 심리가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카프카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변신보다 변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작가는 변신이든 변심이든 이미 변하고 난 후에는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소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도,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다시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감싸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죽은 뒤 새로운 미래를 희망적으로 전망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적인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다.


어쩌면 소통이 단절된 삶, 관계가 해체되어 고립된 삶을 연명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레고르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현실에서의 진정한 해방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렇게라도 위안을 삼지 않으면 이 소설이 주는 허무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나도 오늘 밤 그레고르처럼 불안한 꿈을 꿀 것만 같다. 


<변신/시골의사> _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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