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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30. 2019

재앙 속에서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민음사, 2011)>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작은 도시 오랑에 어느 날 갑자기 창궐한 페스트가 시민 전체의 재앙이 되었다가 스스로 사그라들기까지를 그린 연대기 형식의 소설이다. 소설 속 서술자는 죽음과의 사투 한가운데서 자신이 목도한 인간 군상의 행동과 심리를 여러 증언들과 남겨진 기록물들을 참고하여 회상하듯 전한다. 소설은 무서운 위세로 퍼지는 전염병에 대한 민중들의 심리 변화(놀라움 - 불안감 - 공포 - 체념으로 이어지는)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의 증언 문학처럼 느껴진다.


폐쇄된 도시에 갇힌 인물들 각자의 상황에 몰입해서 읽다 보면, 과연 나라면?’이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과연 나라면 이 같은 극한의 상황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까? 모두에게 닥친 불행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맞서려고 할까 아니면 혼자라도 도피할 방법을 찾으려고 할까? 초월적인 종교에 의지하게 될까 아니면 위기를 이용해 세속적 삶을 영위하려 할까?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서술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과연 나라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현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소설 속에는 페스트라는 대재앙 앞에서도 기록을 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술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물론이고, 그를 도와 보건대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자원봉사를 했던 장 타루는 자신의 수첩에 페스트 일지를 남겼다. 리유는 그 자신이 수집한 증언들과 타루의 수기를 자료로 해서 ‘객관적인 증인의 어조’(p. 392)로 이 연대기를 썼으며 이로써 ‘역사가로서의 과업을 수행’(p. 15)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을 대표하는 엘리 비젤이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살아남고 나니 나는 내 생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살아남은 자로서 희생자들에 대한 ‘충실한 증인’(p.393)이라는 맡은 직분을 완수하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는 것, 그 숭고한 의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설의 또 다른 등장인물, 시청 직원 조지프 그랑의 경우는 차라리 이상에 가깝다. 그는 시청에서 자신이 맡은 직책과 보건대의 봉사활동을 하는 틈틈이 그가 평생을 염원한 완전무결한 글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러나’와 ‘그리고’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퍽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와 ‘그다음에’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가 되면 벌써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지요. ‘그다음에’와 ‘이어서’가 되면 어려움은 더해집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곤란한 것은 ‘그리고’를 쓸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죠.”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장면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해서 나의 문장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는 말의 발걸음, 그 자체와 딱 들어맞는 보조를 갖추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나머지가 더욱 쉬워질 것이고 특히 처음부터 떠오르는 환상의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아마도 ‘모자를 벗으시오!’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때, 그랑은 자기의 그 말 탄 여인에 대해 ‘우아한’이라는 형용사를 결정적으로 포기하고, 앞으로는 ‘날씬한’으로 형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구체적이거든요.”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 그 후에 그는 ‘기막힌’이라는 형용사에 대단히 고심하는 듯이 보였다. 그의 말로는, 그것으로는 별맛이 없어서, 자기가 상상하는 멋진 암말을 대번에 사진으로 찍은 듯이 느껴질 용어를 찾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위태롭게 서 있는 순간에도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해 같은 문장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그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랑은 페스트에 감염되었다가 극적으로 소생한다. 이후 그는 병마와 싸울 때 불태워버렸던 문장을 새로 쓰기 시작한다. 역경 속 기적과 같은 ‘희망’의 인물이자 꺾이지 않는 ‘의지’의 인물이다. 카뮈는 서술자를 통해 이 보잘것없는 인물, 약간의 선량한 마음(p.184)과 매일매일의 사소한 노력(p.185)을 기울이는 그랑을 이 이야기에서의 영웅으로 제시한다. 실제로 카뮈도 2차 세계대전 중 <페스트>를 집필했다고 하니 그랑이라는 인물이 작가의 분신처럼 여겨질 만하다.


역사적으로 질병, 전쟁, 자연재해 등의 예기치 못한 수난 속에서도 기록하는 것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거대한 사회적 부조리와 시련에 맞닥뜨려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들은 매일매일의 성실함으로 일기, 편지, 메모의 형식으로 자신이 몸소 겪은 시대의 한 장면을 남겼다. 그러한 개인의 사소한 기록물이 모이면, 곧 생생한 역사가 된다. 이를 통해 후대의 사람들은 과거를 잊지 않고 반성하여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된다.


일부는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문학 작품을 남기는 기염을 토한다. 작가 카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소설 속 그랑도 성찰과 감동의 글을 남겼을지 모른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이 처한 세상에 맞서 싸워 온 모든 이들에게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페스트> _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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