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의 <혼모노>,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를 읽고
- 성해나의 <혼모노>,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창비, 2025)를 읽고 -
1. 광기와 희열: <혼모노>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는 <<2024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휘모리장단이 몰아치는 가운데 피범벅이 되어 작두춤을 추는 주인공 문수가 내뱉는 단말마,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 큭큭.’(p.154)에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통쾌함인지 섬뜩함인지 구분이 안 되는 여운에 책을 편 채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있다.
주인공 문수는 신내림을 받은 지 벌써 삼십 년이 된 박수무당이다. 그는 여러 신령 중에서도 몸주 장수할멈을 지화가 아닌 생화를 바쳐가며 깍듯이 모셨다. 할멈이 ‘혼모노(진짜)’만 찾으며 까다로운 것도 있지만 특별히 영험했기 때문이다. 장수할멈 덕에 잘나가게 되었다는 국회의원을 단골로 둘 정도였다. 이번에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그는 문수에게 성대한 굿을 주문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수에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언제부턴가 신령들이 그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번아웃 증후군을 진단받은 무당, 유튜브에서 접신 영상을 보며 연습하고 인터넷으로 모형 작두를 주문하는 무당이라니... 하루아침에 ‘니세모노(가짜, 선무당)’로 전락한 문수를 더욱 분노케 한 건, 그렇게 공들여 모신 장수할멈이 언제는 무형문화재의 꿈을 부추기더니 ‘늙은 게 야심만 가득해 흉하다’(p.145)며 앞집 신애기에게 옮겨 갔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국회의원의 굿 의뢰도 신애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문수와 신애기 사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승부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굿판에서 벌어진다. 점점 고조되는 장단에 맞춰 매섭게 벼려놓은 작두 위에서 ‘이제 누가 오래 버티나의 싸움’(p.152)에 돌입하는 두 사람.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고통조차 못 느끼는 문수는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p.153) 섬뜩한 미소를 짓고, 이를 본 신애기는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이것은 삼십 년 무당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신명인 걸까,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일도 꿈도 빼앗긴 한 인간의 광기인 걸까. 신 혹은 운명이라는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박수무당의 처절한 몸짓은 광기와 희열이 교차하는 자기기만적 웃음으로 끝난다.
2. 길티와 플레저: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성해나 작가의 또 다른 소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도 주인공은 자기기만의 혼돈 상태를 경험한다. <혼모노>의 문수가 자기기만을 끝까지 밀고 나가 정신 승리를 거뒀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태껏 믿어왔던 믿음이 깨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겪고 과감히 돌아선다.
주인공에게 영화감독 김곤은 이른바 ‘나만 알고 싶은 감독’(p.9)이었다. 김곤을 둘러싼 팬덤은 그의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데 이어 감독의 수려한 외모가 알려지며 폭발하지만, 신작 촬영 중에 발생한 아역배우 학대 논란으로 주춤해진다. 하지만 김곤을 향한 ‘순수한 사랑’(p.34)을 부르짖던 주인공은 사실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추문일 뿐이라며 이를 애써 무시한다. 친구들로부터, 심지어 남편으로부터 ‘윤리의식’(p.14)을 지적받으면서도 ‘존버’(p.12)한 덕분에 그녀는 골수팬들의 비밀 채팅방 ‘길티 플레저 클럽’(줄여서 길티 클럽)에 초대된다.
‘길티 없이 플레저만 향유’(p.29)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클럽에서 그녀는 속칭 시네필들에게 초짜 취급(‘되게 소녀 같으시네’(p.30))을 받으며 소외되기도 하지만, 감독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증명하며(‘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죠.’(p.49)) 인정받는다. 그랬던 그녀를 한 방에 무너뜨린 건, GV의 마지막에 있었던 감독의 정식 사과였다. 부인하고 싶었던 실체가 ‘탁자 밑 폭탄’(p.54)처럼 던져지자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펑’하고 터진다. 지금까지 유보해 왔던 도덕적 판단이 주인공의 기만적인 행태에 제동을 걸었고 그녀는 헛헛한 기분을 느끼며 김곤을 향한 애정을 거둔다.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미몽>에 빠졌던 그녀는 김곤의 안티들을 향한 <인간불신>의 시기를 거치며 <길티 플레저>를 향유하다 결국은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가 되고 만다(이상은 소설 속 김곤 감독의 필모그래피).
그러나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p.65)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현듯 떠올라 그녀를 괴롭힌다. 치앙마이 타이거 킹덤에서 발톱과 송곳니를 제거한 호랑이를 만지며 부드러운 촉감에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도 역겨운 냄새에 치솟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p.65)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