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작은 일기’

황정은의 <작은 일기>(창비, 2025)를 읽고

by 이연미


황정은의 <작은 일기>(창비, 2025)는 지난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대통령 탄핵까지의 대략 4개월의 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시기를 국가적 사태에 손상되고만 ‘작은 존재’가 거리의 다른 작은 존재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p.190)이라고 요약한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서적이지만, 그 기간을 함께 겪었고 또 견뎠던 이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책이 하나의 마중물이 되어 각자의 ‘작은 일기’로 이어졌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에 나의 지난 일기와 기록을 발췌, 취합해 작가가 바라는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내란 세력의 역사적 심판을 우리는 아직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에.

(*별표: 2025년 9월 12일 부기)


— 2024.12.3. (화)

2024년 12월 3일 11시 30분, 대한민국 전역 비상 계엄 선포.

'계엄'을 이 시대에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헬기와 장갑차가 서울 도심에 출격했다. 시간이 거꾸로 가도 한참을 거꾸로 간 것 같다.


한때 환율이 1,400원대에서 1,450원대로 치솟아 자영업자인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 당장 내일 해외에 입금해야 하는 대금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의 경솔한 판단이 나라와 국민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다.


12월 4일 새벽 1시, 국회 계엄령 해제요구안 가결. (재석 의원 190명 전원 찬성)

대통령 계엄 선포 6시간 만에 해제 발표. (헌법에 ‘지체없이’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 2024.12.4. (수)

비상계엄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일이 없었더라면, 어제의 일기는 원래 이런 내용이었을 거였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쉬는 날이기에 미사 조정경기장에서 러닝을 했다. 6km를 일정한 페이스로 달렸고 마지막 1km는 질주를 했다. 운동 후엔 건강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근처 찜질방에 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쉬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평온한 밤을 기대했는데….


일상의 평화라는 게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 만약 국회가 막아내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상상하면 '충격과 공포'다. 어젯밤 SNS를 통해 외국 친구들의 걱정 어린 메시지를 받았다. 이 무슨 창피한 일인가.


— 2024.12.7. (토)

글쓰기 모임 송년회에서 <태백산맥> 낭독회가 있었다. 처음엔 전라도 말투와 욕설, 예스러운 목소리 톤, 소품을 활용한 연기 등이 그저 재밌었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 좋은 공연을 어쩌면 무대에 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많은 인원이 모이는 이런 자리 자체가 취소되었을 수도 있었다. 낭독자분들은 연습 기간 얼마나 조마조마하셨을까.


송년회가 끝나고 몇몇 분들과 함께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남편이 말렸기에 조금 망설였지만, ‘군인이 보이면 튀어’라는 카톡에 ‘러닝화 신었어’라는 답변을 보내며 발길을 옮겼다. 혹시 모르니 지퍼 달린 바지 주머니에 신분증도 챙겨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폭력적인 사태까지 상상했는가 싶어 간담이 서늘하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낮부터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과 우리처럼 뒤늦게 합류한 사람들로 혼잡했다. 투표가 종료되는 9시 20분의 마지막 1분까지 거리의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투표불성립’이 발표된 순간의 침묵을 잊을 수 없다. 갑자기 매서운 추위가 체감됐다.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탄핵이 되는 그날까지 요구할 겁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렸다. 차분하게 가족과 지인들과 보내야 할 연말을 누가 앗아갔는가. 참담하다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다.


*“길에 나와 있는 자는 항상 정치의 일부가 되기 직전이다.”_ 모리스 블랑쇼, <무한한 대화>


— 2024.12.11. (수)

노벨상 시상식을 생중계로 보고 있다. 'Dear Han Kang'하고 한강 작가를 호명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상식 중계 하단에 12.3 관련 속보가 자막으로 뜨고 있다. <소년이 온다>의 5.18 광주와 지금의 대한민국, 뭔가 더 극적인 느낌이 들기도.


읽고 있는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

'권력을 어둠 속으로 힘껏 조종하는 사람은 햇빛을 누릴 운명에 어울리지 않는다.'_ 샤뤼진, <시간의 압력>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고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겼다는(‘지록위마’) 간신의 대명사 ‘조고’에 대한 글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 군주를 비롯한 만인을 농락하고 무자비한 폭력까지 행사한 사람. 햇빛을 누릴 운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여기 대한민국에도 있다.


— 2024.12.14. (토)

탄핵 투표의 결과를 기다리며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가결되었음이 선포되고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에 응원봉을 흔드는 시민들을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원식 국회의장의 마지막 발언, “취소했던 송년회를 다시 하셔라, 자영업자들이 힘들다, 연말을 행복하게 보내셨으면 좋겠다.”가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뭐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번 사태로 또다시 느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었다.


— 2024.12.27. (금)

환율이 미쳤다. 오늘은 1480원을 찍었다. 1500원대까지 생각해야 한단다. 뉴스만 보면 한숨이, 아니 욕이 나온다. 명징한 사실에 자꾸만 물타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 건강을 위해 당분간 뉴스 시청을 말아야겠다.


— 2024.12.29. (일)

오늘 무안 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가 추락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꼬리 쪽에서 승무원 두 명만 구출되었고 전원 사망했다. 무거운 사회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애도의 마음이다.


— 2025.1.3. (금)

관저에서 버티기에 돌입한 윤석열. 제발 더는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피함은 국민의 몫인가.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는 '만약에 12.3 비상계엄과 내란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직면했을지도 모르는 사태'라는 측면에서 매우 절묘한 시점에 개봉했다. 영화는 분열의 시대를 꼬집고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게끔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는 내란의 참상에 집중하게 된다. 첫 장면부터 윤석열의 담화를 떠올리게 했고, 중간에 헬기와 장갑차가 도로를 달리는 장면은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내란 상황을 상정한 영화라 마지막이 화끈하다. 경호 등 대통령 비호세력은 모두 사살. 관저 깊숙이 숨어 있던 대통령은 두 다리 붙들려 끌려 나온다. 역시 현장에서 사살.


영화에서처럼 두 다리 붙들고 끌고 나와야 하는가, 그러면 안 되겠지만 거친 생각이 불쑥불쑥 솟는다.


— 2025.1.15 (수)

오늘 드디어 윤석열이 체포됐다. 1차 체포 영장 집행 실패 후 온 국민이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참고 기다렸던 순간이다. 민주주의 법치 국가에선 처벌도 법을 지켜가며 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


— 2025.3.1 (토)

그동안 읽은 책.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은행나무, 2024)는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내전 상황을 그리고 있다. 계엄령과 독재정치, 내전,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세가 무척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국가의 폭력에 개인의 삶이 어디까지 추락하고 마는지…. 실체적인 공포가 몰려온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 2014). 570쪽에 달하는 이 책을 나는 내란 사태 이후의 ‘길고 어두운 밤’에 읽었다. ‘개인의 자유’가 위협받는 어제의 세계가 오늘에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와 읽던 책을 내려놓기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 소수의 선동자와 극우 청년 세력의 폭력은 서부지법 폭동을 연상시켰다. 소수일 뿐이라고,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고 무시하는 건 어쩌면 순진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와 안전을 뒤흔들 하나의 경고로 봐야 하지 않을까.


— 2025.3.25 (화)

산불이 진화되지 않고 계속 번지고 있어 걱정이다. 천년고찰이 전소되었다고 하고,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까지 불이 근접해 오고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착잡한 시국인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 2025.3.28 (금)

산불이 주불은 거의 잡혔다고 한다. 타는 대지를 적신 봄비 덕이다. 봄비 소식처럼 헌재에서도 속 시원한 답을 내놓기를 바란다. 분열의 열기로 달아오른 나라를 진정시켜주길.


— 2025.4.3 (목)

드디어 내일이 선고일이다. 상식에 따르는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할 텐데, 이제는 '상식'이라는 것도 없고 '당연한' 것도 없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 2025.4.4 (금)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파면 선고 후의 고요와 평온.


초등학생들도 학교에서 헌재의 판결을 실시간으로 봤다고 한다. 2025년은 이런 시대이다. 시대를 역행하려는 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_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시대에 드리운 그림자가 아직 말끔히 걷히지 않았지만, 빛의 존재를 잊지 말자. 희망 혹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빛.


록산 게이의 칼럼 모음집을 읽기 시작했다. 희망보다는 가능성을 믿는다는 이야기에 깊이 감응했다. (...) 가능성.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그 말을 발견하는 데 오래 걸렸다. 가능성을 믿는 마음, 그걸 믿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내게도 있다.
(<작은 일기>, p.171)


KakaoTalk_20250914_150248412.jpg <작은 일기>(황정은, 창비, 2025)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