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트>(올리버 라세, 2025)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이상하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안이 엄습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앞길에 치명적인 함정이 놓여 있는 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상상이 되었다. 영화 <시라트>(올리버 라세, 2025)의 후유증이다. 영화는 초반엔 강렬한 사운드와 광활한 사막의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하더니 후반부엔 예상치 못한 죽음들을 연속해서 보여주며 혼을 쏙 빼놓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전개에 감독이 담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영화를 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 글은 나름의 답을 내려보려는 이런저런 시도의 흔적이다.
영화는 거대한 스피커를 쌓아 올리는 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돌출된 부분이 없도록 줄을 맞추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이곳은 사막 한가운데 펼쳐진 레이브 음악 축제장이다. 스피커가 찢어질 듯 울리는 사운드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인파를 헤치며 루이스가 어린 아들 에스테반과 함께 집 나간 딸을 찾고 있다. 딸이 레이브 축제에 나타날 거라는 정보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무리의 레이버(레이브 문화를 즐기는 사람을 지칭)들로부터 이곳 ‘모로코’ 말고 더 남쪽 ‘모리타니’에서 다음 파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딸은 그곳에 올지도 모른다.
축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군인들에 의해 중단된다. 모든 이들이 차량에 올라타 군대의 통제하에 한 줄로 이동하고 있을 때, 앞서 다음 장소를 알려주었던 무리가 도로를 이탈해 사막을 질주한다. 루이스와 에스테반도 뒤따른다. 그렇게 가족을 찾겠다는 일념에서 시작된 여정은 사막을 건너는 고행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위태롭게 진행된다. 과연 이들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가족은 재회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같은 질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질문이 다음과 같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슬람교에서 ‘시라트’는 ‘사후세계에서 인간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심판의 다리’로 ‘지옥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낙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뜻한다고 한다. 영화 도입부에 이 다리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는 자막이 뜬다. 여기 인물들 앞에 놓인 길이 딱 그렇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고 가파른 산길은 살짝만 벗어나도 천길 낭떠러지행이다. 어디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막의 지뢰밭은 앞으로 나아갈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이 여정의 목적은 다음 파티도 가족과의 재회도 아닌 생존이 된다.
에스테반이 탄 차가 절벽으로 굴러떨어진 순간부터 아닐까. 죽음이란 본래 불가해하다지만 위험한 낭떠러지를 피해 차 안에서 안전하게 놀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른 결과가 죽음이라니….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3차 세계대전이 터졌다는 바깥세상에서 이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그 언젠가 있었던 전쟁의 흔적인 지뢰가 하나둘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마지막에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난민을 실어 나르는 듯한 열차에 오르지만, 그 길의 끝이 삶인지 죽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내 눈엔 어쩐지 열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고 앞쪽의 철길도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예감은 희망보다는 절망 쪽으로 기울었다.
영화는 종교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암시한다. <시라트>라는 제목부터 그렇지만 그 밖에도 곳곳에 종교적인 기호가 숨어 있다. 스피커의 가로세로 줄은 십자가 형태이고, 여정 어딘가에 켜져 있던 텔레비전엔 이슬람 메카의 영상이 재생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어쩐지 순례자 같기도,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 사막을 떠도는 유대민족 같기도 했다. 특히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고통받던 루이스가 애도 의식에서 레이브 문화에 동화되더니 지뢰밭을 유유히 건너 바위산에 오르는 모습에선 모세가 연상됐다. 그 순간에 루이스는 마치 신의 보호를 받는 자, 혹은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 같았다. 영화 초반만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자, 무리를 뒤따르던 자였던 루이스는 어느 순간부터 돕는 자, 무리를 이끄는 자로 변모한다. 루이스가 이끈 이들 중 몇몇은 사막을 탈출한다.
또는 사막에서 레이브 문화를 즐기던 이들을 유목민(노마드)이라고 보면, 전체 이야기가 서구 식민 지배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에서 레이브 음악의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무아지경에 빠진 참가자들의 몸동작이 나는 어쩐지 춤이라기보단 ‘제의’처럼 느껴졌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 장애를 가진 이, 슬픈 눈을 가진 이를 모두 포용해 가족으로 받아들인 하나의 부족이다. 전쟁과 군대의 위협은 오지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만끽하며 즐겁게 살던 선주민들에게 들이닥친 제국주의의 폭력을 비유하는 듯했다. 낙원에서 쫓겨난 선주민들은 살 곳을 찾아 이동하지만 생존의 길은 ‘시라트’처럼 험하다. 올리버 라세 감독은 프랑스 태생 스페인인이다. 배경이 된 모로코와 모리타니, 그리고 서사하라 지역은 과거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시라트>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르는 영화다. 사막처럼 삭막하고 지뢰밭처럼 위험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길을 모색해야 할까?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우리가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노력이 필요할까? 우리의 삶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이대로 나아가면 우리가 도달할 곳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