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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an 22. 2020

'행복한 가정'에 매달리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민음사, 1999)>는 첫 장을 펼치고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간 소설이다. 그만큼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고 전개가 흥미진진했다. 결혼 후의 ‘출산과 육아의 고단함’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주제를 작가는 순식간에 비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운 이야기로 탈바꿈시켰다. 빠르게 읽힌 소설이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아 한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도대체 이 가족의 불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과연 이들의 다섯째 아이, 벤은 ‘괴물’인 걸까? 그런 아이를 낳고 모두의 반대에도 기르려 한 해리엇은 모성애라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죄인’인 걸까? 한 편의 이야기 안에 작가는 인간의 ‘행과 불행’,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모성애’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을 담았다.




시대에 맞지 않게 보수적인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전통적인 가정 - ‘적어도 애는 여섯 명(p.14)’을 낳아 방이 많고 정원이 있는 거대한 집에서 키우는 것 - 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서로 공유한다. 이들은 루크, 헬렌, 제인, 폴을 차례로 낳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 벤을 가지면서 이 모든 것은 송두리째 파괴된다. 벤의 아버지 데이비드를 비롯한 가족 친지들은 비정상적인 벤을 요양소에 버리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해리엇은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오고 이로 인해 가족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결국 엄마인 해리엇만이 홀로 벤과 커다란 집에 남는다. 그리고 소설은 벤이 완전히 떠나버리고 그 집을 팔 날만을 기다리는 해리엇의 심리를 묘사하며 막을 내린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p.30)


소설 초반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행복’이라는 단어, 그리고 너무나 단정적인 마침표로 인해 불길함을 자아냈다. 행복을 단언하기엔 아직 이른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연 가정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소설 속 데이비드와 해리엇 부부처럼 ‘여러 명의 아이들과 그들이 뛰어놀 집’이라는 물리적인 조건들로 완성될 수 있는 가치인 것일까? 어쩌면 이들은 완벽한 가정이라는 이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불행의 씨앗 하나에도 쉽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을까? 부모의 이혼과 재혼, 배우자의 외도, 다운 증후군 아이처럼 예기치 못한 불행의 요소들은 언제든 우리 삶에 끼어들 수 있다. 작가는 행복이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며, 어떤 조건들이 만족되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취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임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 (…)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p.159)”라는 해리엇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유대감이 강했던 이 가족을 해체시켜버린 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해리엇은 벤을 ‘도깨비, 괴물, 별종, 짐승, 거인, 외계인’이라 부르고 심지어는 수천만 년 전에 정점에 도달했던, 인간과는 다른 종족의 DNA를 갖고 태어난 ‘네안데르탈인 아기(p.73)’라고 느낀다. 우연히 나타난 평범하지 않은 유전자의 아이. 우리 가족과는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아이. 가족이라는 동질 집단에서 두드러지게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벤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낳은 것은 아니었을까? 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에 대해 소설 속 전문가들은 – 브래트 박사, 그레이브즈 교장, 길리 박사 - 끝까지 진단 내리기를 거부한다. 대신 작가는 벤도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여지는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존과 그 일행들, 그리고 벤을 추종하는 데릭 무리들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벤이 비정상이라고 우리 중 누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지 소설은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해리엇의 내면을 묘사한다. 해리엇은 벤을 바라보며 불쌍함과 혐오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면서도, 어머니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데이비드는 “어쨌건 그 앤 내 애가 확실히 아니야(p.101)”라며 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를 가족들로부터 영원히 제거하려는 무자비함을 드러낸다. 벤을 포기하지 않는 해리엇의 노력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나머지 가족을 배신한 죄인이라 비난받는다. 해리엇이 ‘가정의 파괴자(p.159)’ 취급을 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 걸까? 어쩌면 해리엇은 이 가족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늘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책임을 지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찾으니 말이다. 해리엇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마지막까지 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경지에는 도달한다. 그녀는 곧 자신을 떠날 벤의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의 능력 너머의 것들을 인식한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나 모성애의 위대함 같은 이상적인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뚜렷한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상과 괴리된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다섯째 아이> _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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