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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an 08. 2020

000의 세계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를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다만 그것을 날 것 그대로 밖으로 표현하며 사는 사람이 적을 뿐. 보통 우리는 성장하면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의 ‘나’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사는 법을 배운다. 그나마 학창 시절까지는 ‘남들과 다른 자아’를 ‘개성’으로 봐주는 순수한 시각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사회로 나오는 순간 이러한 특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남다름’은 다수에 동화되지 않는 ‘유별남’으로 변질되고, 사람들은 이런 이를 너그럽게 이해하기보다는 ‘불편한 사람’으로 쉽게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올곧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넣어 ‘000의 세계’라고 찬사를 보낼 만하지 않을까?




<조중균의 세계>김금희의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중균’이라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사람이다. 소설은 조중균씨가 교정, 교열 담당자로 근무하는 회사에 수습으로 입사한 ‘영주’가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본 조중균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중균씨는 다수에 편승하고 권력에 굴복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그는 유급을 당해 군대에 가는 한이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는 점수(p.65)’를 끝까지 거부한 사람이다. 데모에 가담한 혐의로 붙들렸을 때에 형사에게 받은 모욕을 평생 잊지 않고 되갚으려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그는 점심을 먹지 않고 식대를 돌려받을 근로자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사람이고, 한 시간씩 정수기 옆에 서있더라도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내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맡은 일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고 절대로 나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동창 ‘형수씨’는 그가 드라마가 있는 ‘멋있는 놈’, ‘난 놈(p.66)’이라고 칭송한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조중균씨가 현세의 영웅이라도 될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회사에서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p.47)'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우직함과 성실함이 그 가치를 인정받던 낭만적인 시대는 끝났다. 조중균씨가 지은 시의 제목처럼 ‘지나간 세계(p.50)’가 된 지 오래다. 조직에서는 자기 세계가 강한 사람을 ‘융통성이 없다’며 부담스러워한다.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나’를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다른 이들에게 ‘사회생활 헛했다(p.48)’는 핀잔을 듣지 않는다. 조직에서는 조중균씨 같은 사람을 ‘고집이 세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며, 문제가 많고 융화가 안 되는 사람(p.51)’으로 평가한다. 영주와 정식 사원의 자리를 놓고 ‘석연찮은 경쟁(p.45)’을 해야 했던 ‘해란’도 마찬가지다. 성실하기만 하고 상사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능력이 없으면 그 존재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 조중균씨의 시처럼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낭송할 수 있게 두면, 그 일은 ‘나’의 실적이 되지 못한다. 경쟁 사회에서는 ‘남’의 공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소설에서 ‘이름을 적는 행위’는 어떤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주체적인 행동 중 하나를 상징한다. 그래서 조중균씨는 이름만 적으면 시험을 통과시켜주겠다는 교수의 요구에 마지막 순간까지 이름을 적지 않는다. 조중균씨의 수첩에 적힌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 문장 뒤 서명란에는 그의 세계를 알 것만 같았던 ‘해란’의 이름은 적혀 있지만 ‘영주’의 이름은 없다. 반면에 영주는 ‘직무 유기, 태만(p.69)’이라는 명목으로 해고된 조중균씨의 해고 경위서에는 서명을 함으로써 정식 직원으로 안착한다.


아마도 영주는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평을 들으며 버젓한 경력을 쌓아 갈 것이다. 사람을 고기나 상품에다 비유하는 부장의 불편한 말마따나 고생한 티가 나는 ‘주먹고기’ 해란과는 달리 ‘팩에 든 고기(p.46)’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소설 말미에서 부장에게 ‘주먹고기’는 ‘주먹구구가 아닌 주먹(p.70)’이라며 술김에 치기 어린 반항을 해본다. 그리고 그녀는 조중균씨와 그의 세계를 ‘간신히’라도 기억하려 애쓴다. 어쩌면 그녀는 이 냉혹한 사회에서 그래도 조금은 타인의 세계를, 어두운 편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녀 이름 석자의 세계를 구축해서 적당히 유연하지만 현명하게 지켜나가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을까? 소설의 마지막 영주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기대를 한번 걸어본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가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씨의 세계였다. (p.71)


김금희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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