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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Nov 25. 2019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 화장품 브랜드의 광고 담당 기획을 할 때의 일이다. 공익 캠페인의 일환으로 여성 시각장애인을 위한 메이크업 이벤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화장품의 색마다 고유의 향(Scent)을 입혀서, 컬러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도 다른 감각 - 예민하게 발달한 후각 -을 통해 색을 선택할 수 있게 해 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일이었다. 시각장애인 자신이 직접 컬러를 선택하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메이크업을 해주고, 이 모습을 사진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화보 촬영까지 이어지는 행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내게 일은 일이었다. 여러 바쁜 업무들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데다 평소 업무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 일이 나는 달갑지 않았다. 이벤트에 참석할 시각장애인들을 모집하는 것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 포토그래퍼, 영상 촬영팀의 섭외에서 현장 관리까지, 모두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는 처음이었던 나는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다. 


난관은 시각장애인들을 현장으로 안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00역 0번 출구 앞 00 편의점에서 좌회전하시고요, 직진하다 첫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하시면 00 빌딩이 보이시거든요. 거기 2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와 같은 설명은 통하지 않았다. 역에 도착했다며 전화를 한 참석자에게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제가 역 앞으로 나갈게요. 거기 계세요!”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챙길 것이 많아 바빴지만,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았다. 때론 말보다 몸으로 움직이는 게 더 나은 법이다. 지하철 역 입구에는 안내견과 함께 온 20대 여대생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면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을까?’ 그 쉽지 않았을 여정을 한번 상상해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낯선 곳을 혼자서 찾아가야 한다? 나라면 덜컥 겁부터 났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들은 용감했다. 손으로 더듬으며 전체 공간을 익혀가는 모습을 나는 그저 놀라워하며 바라보았다. 현장에서 내 역할은 한 번의 안내뿐. 그다음은 다들 스스로 배워 나갔다. 그 이상의 도움은 오히려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이들만의 방식이 있구나’ 하고 얼핏 느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문학동네, 2007)>을 읽으며 이 에피소드가 떠오른 건, 소설 속 화자의 모습에서 그날의 내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대성당>은 주인공의 아내가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맹인인 로버트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그린 짤막한 단편이다. 화자인 남편은 맹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난감하고 불편하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거나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영화에서 본 것들(p.287)’만 떠올랐고, 선입견 –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p.295)’-을 가지고 그를 대한다. 대화를 피하고자 켠 TV에서 대성당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자, 그는 맹인에게 “(…)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p.305)"라고 묻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메이크업 행사’라는 타이틀에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화장이 무슨 소용이며 화보 사진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조차도 메이크업으로 꾸민 겉모습이 그녀들에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어 다소 회의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들은 예쁘게 메이크업된 자신의 얼굴을 상상하며 내내 들떠 있었고, 오늘 찍은 사진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은 보지 못해도 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아름다워진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예쁜 화장과 잘 찍은 사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 자체가 그녀들 스스로를 한층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메이크업 이벤트 'The Scent of Colors'


소설의 말미에 화자는 맹인과 손을 포개어 잡고 종이에 대성당을 그린다.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대성당을 맹인의 방식인 그림으로 표현하며,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보는 법’을 배운다. 그 순간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던 대성당이 대단한 어떤 것이 되고, 그는 갇혀 있던 자신의 세계가 무한정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맹인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조차 꺼렸던 그가 밖을 향해, 즉 타인을 향해 열리게 된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어쩌면 그날 내 마음을 스쳤던 생각,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다'는 것도 비슷한 깨달음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세계도 그 작은 경험으로 조금은 확장되었을까?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노력을 멈추지 말라는 맹인의 당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


<대성당> _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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