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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6. 2020

낡은 자전거와 바다와
녹음기와 시(詩)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네루다 앞에서 생애 처음 메타포를 읊었을 때, 어쩌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는 파블로 네루다를 향한, 시를 향한, 한 편의 헌사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 네루다와 소박한 시골 청년 마리오가 시를 매개로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낸다.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원작 소설이기도 하다. 영화는 스카르메타의 소설에 잔잔하고 서정적인 이미지와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음악을 더했다고 평가받는다.     


작은 포구 마을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이슬라 네그라에 머무는 단 한 사람의 수신자 네루다를 위해 매일같이 편지를 배달한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시골길을 낡은 자전거로 달리며 그는 거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설렌다. 마리오는 혹시나 시인의 시집에 헌사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집을 가슴에 품고 다니다가, 아뿔싸! 시인의 시를 모두 읽고 외워버린다. 우체국과 네루다의 집을 왕복하는, 느리지만 힘차게 나아가는 자전거. 시는 그렇게 매일의 노동을 통해 반갑게 만나는 것인가 보다.     


마리오가 자전거로 우편배달하는 장면 _ <일 포스티노> 中


마리오는 바닷가에서 네루다가 낭송하는 시를 듣고 난생처음 시를 - 운율과 메타포를 - 알게 된다. 마리오의 표현에 의하면 ‘단어들이 이리저리 (바다처럼) 움직(p.31)’이는 느낌이 운율이고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p.32)’였다. 시인은 마리오의 참신함에 감탄하고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라고 김수영 시인이 말했듯이, 그 순간 네루다는 어쩌면 마리오에게서 비슷한 감수성과 열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온종일 바다를 바라봐도 아무 의미 없는 동그라미만 떠오르지만,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하는 단조로운 대사만 읊조리지만, 마리오는 점차 시인을 닮아간다.     


바닷가에서 네루다가 낭송하는 시를 듣는 마리오 _ <일 포스티노> 中


베아트리스는 마리오가 첫눈에 반한 미모의 여성이다. 마리오는 그녀에게 네루다의 시를 빌려 고백하고 사랑을 쟁취하며 ‘유능한 뚜쟁이 시인(p.75)’으로서의 네루다의 지위를 공고히 해준다. 남의 시를 표절했냐는 네루다의 채근에 마리오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p.85)’이라고 당돌하게 대답한다. ‘꿀 먹은 벙어리(p.42)’ 같던 마리오가 드디어 시인이 되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p.28)’게 된 것이다.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진 시인 단테가 된 것이다.     


이후 파리로 떠난 네루다를 위해 마리오는 녹음기로 이슬라 네그라의 모든 소리를 녹음한다. 바람 소리, 종소리,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자연이 지은 아름다운 시를 녹음기가 받아 적는다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고요에 가까울 밤하늘의 별과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소리도 녹음기에 담긴다. 마리오의 순수함이 빛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마리오는 자신과 베아트리스의 아이, 네루다의 이름을 따온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의 울음소리’를 녹음한다. 시가 생명을 잉태했다.     


이슬라 네그라의 밤하늘 소리를 녹음하는 마리오 _ <일 포스티노> 中


소설은 칠레의 쿠데타 이후 네루다의 몰락과 죽음, 마리오의 납치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끝맺는다. 서문에서 저자가 경고했듯이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p.10)’이 나지만, 독자들은 절망보다는 정진하는 용기와 희망을, 갈등보다는 고양된 감정과 순수한 정열을 느꼈을 것이다. 마리오의 시는 끝내 공모전에서 낙방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시는 끝없이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평범한 듯하지만 특별한, 진실된 꿈 한 조각을 상기하며 긴 여운에 젖는다.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_ 황현산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 中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일 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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