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 리뷰
본 리뷰에는 공연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을 여행하면 누구나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나쯤은 보려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색다른 공연, 나만의 강렬한 경험을 찾는다면 이머시브(immersive)* 공연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를 추천한다. 이 연극이 온전히 ‘나만의 경험’이 되는 이유는, 같은 시각 같은 공연을 보아도 관객 모두가 각기 다른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슬립 노 모어>가 공연되는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은 극장들이 모여있는 뉴욕의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첼시 지역의 외딴 거리에 있다. 공연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면 공연장 입구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어둑한 골목이다. 호텔을 개조한 공연장은 6층 건물로, 연극은 이 건물 전체 100여 개의 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즉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관객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건물의 곳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연극을 관람해야 한다는 소리다. 연극에 몰입하게 되면 배우를 따라 방에서 방으로, 복도와 계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되니 관람에 체력이 요구되는 연극이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 관객은 우선 겉옷과 가방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트럼프 카드를 하나씩 받으면(트럼프 카드에 적힌 숫자가 입장 순서라고 한다), 일종의 대기 공간인 음악이 흐르는 바(BAR)로 안내된다.
관객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은 이곳까지다. 이후 관객들은 배우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태워지고, 마스크를 쓴 채 층마다 무작위적으로 내려진다. 공연 관람의 가이드는 딱 세 가지, 마스크를 벗지 말 것, 대화를 나누지 말 것, 최대한 많이 돌아다닐 것. 나는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순간 뒤에서 문이 닫히며 함께 간 일행과 불시에 헤어졌고, 이후 세 시간의 공연 중 내가 일행을 만난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렇게 발을 디딘 연극의 공간은 오싹했다. 적막과 안갯속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관객들은 순식간에 분위기에 압도된다. 어둠 속을 배회하다 보면 갑자기 어디선가 배우들이 튀어나와 연극이 벌어진다. 마스크를 쓴 관객들이 모여들고, 배우는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대사 없이 행위예술에 가까운 연극을 펼쳐 보인다. 과격한 몸짓과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연기. 배우들이 흩어지면 관객들도 그들을 따라 다급하게 사라진다. 이 모든 상황에서 관객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와 칙칙한 대기 속을 떠돌자.
-셰익스피어, <맥베스(Macbeth)>-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은 세 시간 동안 세 번 반복되고 관객들은 각자가 본 장면들을 조각조각 이어서 전체의 줄거리를 짐작해야 한다. 관객 개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연극의 이해에 가까워진다는 것이겠지만, 단언컨대 그 누구도 한 번 관람해서는 이 연극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도 연극이 끝나고 함께 갔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충격적이게도 일치하는 장면이 한두 장면밖에 없었다. 자신이 본 장면들을 가지고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다 보니 서로의 작품 해석도 완전히 달랐다. 세 시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는데 이렇게나 못 본 장면이 많다니. 그래서 이 연극은 N차 관람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배우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1:1 연극도 펼쳐지는데 보통 재관람자들이 미리 알고 그 기회를 얻어 가는 것 같다.
이 연극은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접하면 새롭다 못해 충격적이다. 그것 또한 기억에 남는 독특한 체험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인물들의 역할이나 스토리 측면에서 혼란스러울 수 있다. 연극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맥베스(Macbeth)>의 기본 줄거리를 알고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맥베스는 어느 날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을 듣게 된다.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는 아내(맥베스 부인)와 합심하여 덩컨 왕을 시해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다. 왕을 살해하는 순간 맥베스는 ‘못 자리라! 맥베스는 잠을 죽여 버렸다.’ 외치는 환청을 듣는다. 연극의 제목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바로 이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글래미스 영주시다! (중략) 코도의 영주시다! (중략) 왕이 되실 분이다.”
(1.3.48-50) _ 세 마녀(Witches)의 예언
내가 보았던 회차에서 세 마녀는 여성 2명, 남성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셋이 모여서 이상한 춤을 추며 예언을 하는 듯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을 시해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살해 장면을 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한다), 온몸에 피가 묻은 맥베스를 맥베스 부인이 욕조에서 씻겨주는 장면은 보았다(배우들이 전라가 되는 파격적인 장면이다).
“저 대양의 모든 물로 내 손에서 이 피를 씻어 낼 수 있을까? 아냐, 내 손이 오히려 광대무변 온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 푸른 물을 다 붉히리.”
(2.2.59-62) _ 맥베스의 대사
이후 맥베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그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 - 뱅쿠오와 맥더프의 처와 자식까지 - 을 차례로 살해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만찬에서 자신이 죽인 뱅쿠오의 환영을 본 맥베스는 공포에 사로잡혀 세 마녀를 찾아가 두 번째 예언을 듣는다. 마녀들은 "여자가 낳은 자는 아무도 맥베스를 못 해칠" 것이며, "버남의 큰 수풀이 던시네인 언덕으로 맥베스를 대적하여 다가오기 전에는" 절대 정복되지 않을 것이라 예언한다. 하지만 이는 '때 이르게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온 자가 그를 죽이고,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한 군대가 그의 성을 함락할 것’이라는 이중적인 뜻의 예언이었다.
“나는 두려움의 맛을 거의 잊어버렸다. 밤의 비명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진 적이 있었지, 그리고 머리칼이 음산한 이야기에 곤두서고 떨었지. 마치 생명이라도 지닌 것처럼. 나는 공포로 충만했어.”
(5.5.9-13) _ 맥베스의 대사
맥베스 부인은 죄책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손을 씻는 행동을 반복하는 몽유병을 앓다가 죽는다. 결국 아내의 죽음에 허무함을 느낀 맥베스 자신도 세 마녀의 예언에 따라 파멸하면서 비극은 마무리된다.
연극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모이는 만찬 장면은 이 연극의 파이널 시퀀스이자 하이라이트다(마찬가지로 세 번 반복되는데 마지막 그란데 피날레는 조금 다른 장면이 있으니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 긴 테이블 양 끝에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앉고, 피를 흘리는 뱅쿠오의 환영도 중간에 등장한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처럼 연출된 이 장면은 사이키델릭한 조명과 슬로 모션이 합쳐져 기괴하면서 동시에 소름 끼치게 아름답다. 마녀의 대사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연극의 중간에 어디선가(정확히 몇 층 어느 방에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다) 사이키델릭 조명의 파티 혹은 예언 장면이 있다고 한다. 배우들이 피를 뒤집어쓰고 전라가 되어 연기하는 이 장면도 연극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데 나는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다(함께 간 지인은 두 번 보았다고 한다). 이 연극을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이유다.
그란드 피날레의 만찬 장면까지 끝이 나면 배우들이 관객들을 처음의 바(BAR)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세 시간의 연극은 끝이 나고 일행과 다시 만난 사람들은 각자가 본 장면들에 관해 열광적으로 이야기 나눈다. 토론은 끝이 없어서 관객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 집과 호텔로 돌아와서도 인터넷을 찾아보고 이야기를 맞춰보다가, 결국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5.5.19-28)
<<셰익스피어 전집 5>>(민음사, 2014)의 <맥베스(Macbeth)>
*이머시브(immersive) 연극은 관객이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수동적으로 감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하는 관객 참여형, 관객 몰입형 공연을 말한다.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Punchdrunk)가 연출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이머시브 연극'의 흥행을 선도한 작품이다.
[참고 도서]
<셰익스피어 X 황광수> (아르테, 2018)
<<셰익스피어 전집 5>>(민음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