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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y 01. 2020

글을 쓰는 이유

제임스 설터의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읽고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만나는 문장 한 줄 마음을 빼앗기 책이 있다. 나에겐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마음산책, 2020)>이 그랬다. 위 문장은 책의 첫 번째 산문 ‘나는 왜 쓰는가(1999년)’에서 발췌되어 첫머리에 실려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특히 글쓰기가 직업도 아니고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한 편의 글을 완성하겠다고 밤을 새워가며 끈덕지게 매달리고 있을 때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내 글의 독자는 나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아 보아도 마땅히 읽을 사람도 없는 글에 노력을 쏟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글쓰기에 회의감이 들려고 할 때,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라는 설터의 말은 설득적으로 다가왔다. 아, 사라지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는 세계에서 내가 붙들고 싶은 것들을 글로 남기고 있는 거구나!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p.27)  

   

시간이 흐르면 순간의 생생했던 감정과 깨우침은 사라지고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퇴색된다. 그러므로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언젠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 있다. 글쓰기는 글 쓰는 주체에게 사라져 가는 것들의 운명을 거슬러 영구 보존하는 힘을 선사한다.     


기록의 의미는 사회적 차원으로도 확장된다. 죽음은 한평생 몰두한 지식도, 경험도, 성찰도 존재와 함께 땅에 묻는다. 후대가 배웠으면 하는 삶의 빛도, 반성했으면 하는 그림자도 같이 사라진다. 한 세대의 교훈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 기록해둔다면 그 영향이 미미할지라도 누군가는 거기서 무언가 배움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이때야 비로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보다 높은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글쓰기란 감옥, 절대 석방되지 않을 것이지만 어찌 보면 낙원인 섬과 같다. 고독, 사색, 이 순간 이해한 것과 온 마음으로 믿고 싶은 것의 정수를 단어에 담는 놀라운 기쁨이 있는 섬.” (p.29)     


제임스 설터는 작가가 되고자 전도유망한 공군 조종사를 그만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에게만 특정한 방식으로 보이는 세상을 글로 옮기고자 한 열망이 그를 끊임없이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했다고 회상한다. 그의 말대로 글쓰기가 절대 석방되지 않을 ‘감옥’이라 할지라도, 내가 경험한 순간과 믿는 세계를 단어로 포획하고 영구히 보존하는 기쁨이 넘치는 ‘낙원인 섬’이라면 계속해서 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을까?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_ 제임스 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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