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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13. 2020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이 남긴
마지막 희망(Ⅱ)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발췌 및 요약

다음은 프리모 레비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통해 제기한 중요 논점들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냉철한 인간탐구와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서문]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p.17)     

레비는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가 생환자들(‘구조된 자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완전한 증인은 바닥까지 가본 사람, 즉 ‘가라앉은 자들’이지만, 그들은 죽거나 심하게 고통받아서 증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1장. 상처의 기억]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적어도 피해자의 마음을 심란케 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마음 깊숙이 그 기억을 몰아내버린다. (p.24)     

제1장 ‘상처의 기억’은 ‘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극단적인 경험, 즉 상처의 기억은 희생자와 압제자 양자에게서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의 조작이나 제거, 표류가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양자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언에 의존한 역사 서술은 ‘의심스러운 출처에서 퍼 올린 것’이며,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를 세심하게 검토하고 고찰해야 한다고 레비는 말한다.     




[2장. 회색지대]

(...)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우리”라는 말은 그 경계를 잃었고, 대립하는 자들이 두 편으로 나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p.41)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떠올리면, ‘희생자-박해자’, ‘선-악’, ‘승자-패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레비는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며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 즉 타협할 준비가 된 ‘회색 인간들’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지적한다. 이들 특권층 포로들은 나치의 외부 조력자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특수부대를 조직한 것은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고 공범 관계로 묶으려 한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고 레비는 말한다.     




[3장. 수치]

대부분의 경우 해방의 순간은 기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보통은 파괴와 대량학살의 비극적 배경 위로 고통의 종이 울렸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끼는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그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 (p.81-82)     

3장에서 레비는 해방 후에 생환자들이 맞닥뜨린 인간적 고통인 ‘수치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해방 후(종종 해방된 직후에) 일어난 자살의 많은 경우가 바로 이러한 감정에 기인했다고 그는 추측한다. 반면에 포로생활 중에 자살이 드물었던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적나라하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p.88)’라는 것이다. 그만큼 수용소 내 포로들은 '동물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생환자들이 자유를 되찾고 마땅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자신보다 약자였던 누군가에게 충분한 도움을 베풀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럽게 느꼈으며, 특히 자신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대신 산다는 의심의 그림자를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4장. 소통하기]

요컨대 텅 빈 공동 속에 있게 되며, 의사소통이 정보를 만든다는 것과 정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된다.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은 (...) 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 (p.110)     

온갖 국적의 사람들을 몰아넣었던 라거(수용소)에서 포로들은 소통의 부재와 불가능성에 고통받아야 했다고 레비는 말한다. 독일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른 정보의 차이는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언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포로들은 인간이 아닌 가축과 비슷한 상태로 전락했다. 


전후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라거에서 통용된 언어는 ‘제3 제국의 언어’라고 따로 명명해야 할 정도로 독일어의 ‘야만적 변형’이었으며, 대부분이 은어와 욕설로 점철되었다고 한다. 레비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p.116)”는 증거라고 말한다.     




[5장. 쓸데없는 폭력]

히틀러의 12년은 다른 많은 역사적 시공간들과 폭력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기만의 특징이 쓸데없는 폭력의 만연이었다고 믿는다. 오로지 고통을 유발하려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 말이다. (p.127)     

레비는 이번 장에서 나치의 지나치게 가혹했던 폭력을 고발한다. 최소한의 물품조차 없었던 강제수송열차의 가혹함, 온갖 존엄성을 짓밟는 강압적인 행위들, 고문처럼 행해진 의학적 실험들, 그리고 인간의 유해에까지 확대된 폭력 등. 쓸데없이 잔혹했던 폭력의 유용성을 깊이 고민한 레비는, 희생자를 인간 이하로 전락시킴으로써 죽이는 자가 느낄 죄의 무게를 덜기 위한 것이었다는 잔인한 진실에 다다른다.     




[6장. 아우슈비츠의 지식인]

대부분 육체노동이었던 라거의 노동에서,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사람의 상황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나빴다.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했다. (p.160)     

레비는 수용소에서의 전반적인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교양이 있는 지식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육체노동에서 힘이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연장을 다루는 법에도 미숙했고, 무엇보다 비논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7장. 고정관념들]

일이 다 벌어진 뒤의 뒤늦은 깨달음과 고정관념들을 경계해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여기에서 통용되는 잣대로 멀리 떨어진 시대와 장소를 판단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p.201)     

수용소에서 생환한 사람들은 역사적 증인이기에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역사가나 철학자도 대답하기 어려운 ‘왜’를 묻곤 했다고 한다. 나치 체제 초기에 사태의 징후가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왜’ 사전에 대피하지 않았는지, 수용소에서의 억압에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 등의 물음이 그것이다. 


레비는 ‘감금’의 필연적 귀결은 ‘탈출’이고, ‘억압’에는 ‘반란이나 저항’이라는 개념적 결합은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운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실제 상황은 이렇게 단순화되지 않을뿐더러 현재의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간극이 크다고 그는 말한다. 수용소에서의 억압은 극단적이고 효율적이어서 포로들의 반란이 있었지만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레비는 오늘날의 잣대로 지난 과거를 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8장. 독일인들의 편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이 남자(아돌프 히틀러)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극도로 명확한 생각들을 가진, 일관성 있는 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 생각들을 바꾸지도 않았고 결코 숨기지도 않았다.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당연히 그의 생각들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 (p.219)     

이번 장에서 레비는 그의 첫 책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독일인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다수는 저자가 일깨워준 역사적 사실에 반성하는 마음과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일부 독자는 얼핏 보면 그의 책에 찬사를 보내는 것 같지만, 실상은 히틀러가 ‘악’이며 자신들은 배신을 당한 ‘악의 포로’일뿐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한 독일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레비는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썼을 때부터 일관되고 극단적인 주장을 숨기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 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p.247)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p.251-252)    

 레비는 이 책의 결론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한 핵심은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p.247)’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폭력성을 감춘 ‘아름다운 말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홀로코스트가 우리와 똑같은 평균적인 인간들에 의해 자행된 비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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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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