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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11. 2020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이 남긴
마지막 희망(Ⅰ)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고 싶은 마음에 샀지만, 막상 읽기가 겁이 나는 책이 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가 그랬다. 그렇다고 영영 외면하기에는 존재 자체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책. 대면하기 힘든 진실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책장을 펼쳤다. 레비의 말대로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p.247)’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 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p.247)


저자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그는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시작으로 수 권의 저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사건을 ‘증언’했다. 그리고 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는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다. 한국어판 제목 아래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라는 부제가 적혀 있는 이유다.      


평균 생존 기간이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1년 10개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그였다. 종전 후 40여 년의 긴 세월을 증인이자 투사로 살아낸 그였다. 그런 그였기에 나는 그의 삶이 68세의 나이에 투신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레비는 이 책에서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p.181)’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p.257)’이었다. 어쩌면 그는 나치의 절멸 체제에 관한, 인간 존재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그의 사상적 고투를 이 책에 모두 쏟아붓고 더 이상의 삶의 목표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을 거부한 투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남은 인생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이다. 불확실한 삶이라면 가능성을 희망이라 믿고 살겠지만 확실한 상태에서 선택은 많지 않다.”

_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중에서 ‘살아남은 자의 아픔_프리모 레비’ (p.275)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엔 프리모 레비의 생전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인용된 콜리지의 시구, 그때 이후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를 언급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불확실한 시간에 그 기억들이 돌아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상습범이지요."    

 

어쩌면 어떤 비극은 인간의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뛰어넘어 슬프게도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레비는 홀로코스트가 인류에게 남긴 역사적 교훈이 시간이 갈수록 잊히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1975년경 일어난 캄보디아 킬링 필드 대학살을 언급하며, 아우슈비츠와 같은 폭력은 나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기이고 따라서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홀로코스트가 가능했던 건 옳지 못한 신념을 가진 정치적 리더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지지하거나 묵인하고 비겁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삼킨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비는 지금도 우리가 무관심한 틈을 타 폭력은 가까이에우리 주위에 있(p.256)’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p.251-252)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어떤 독자가 레비에게 쓴 편지의 내용처럼 책이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권력에 휩쓸리고 폭력을 용인하며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는지,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비참하고 절망적인 감정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러 번 곱씹어 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저자처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말이다.


레비는 구조된 자로서 가라앉은 자들을 대신해 비극의 역사를 세상에 상기시키는 소임을 다했다그는 인간 존재를 집요하게 파헤쳐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사건의 본질적인 이해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암흑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의 고찰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이 책은 레비가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간절한 희망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_ 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발췌 및 요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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