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을 걷다가, 4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사당역 안을 걷다가, 때론 한바탕 달리기를 마치고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가다 아!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영감은 글쓰기의 원천이 되고 개인적으론 많이 읽히는 글인지의 여부를 떠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높은 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영감은 예고가 없다. 또한 정작 갈구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보통 무방비 상태일 때, 적을 무언가도 없고 GPS 워치 하나 차고 뛰다가 돌아가는 길에 무언가 떠오르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들어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 뭐였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집안에서야 곳곳에 노란색 리걸패드와 4B연필을 두기에 뭔가 떠올리면 바로 적을 수가 있는데 외부에서의 무방비 상태로 영감이 다가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달릴 때 휴대전화를 들고 갈 수도 있지만 달리기에 온전히 집중하기엔 아무것도 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불필요한 휴대전화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럴 땐 GPS 워치에 음성녹음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뭔가 떠오른 즉시 바로 음성 메모를 남겨두면 될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 영감이라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부여잡고 싶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때 떠오른 한 가지 생각으로 쭉 글을 써내려 가야 하는데, 그런 감정, 사실, 판단, 정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간과 장소가 바뀌면 왜곡이 되거나 대부분이 휘발된다. 그래서 뭔가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생각 든 모든 것을 어떻게든 기록하고 움직이는 편이 낫다.
양재천에 서서 한참을 기록하든, 청계산 매봉에 오를 무렵 숨을 헐떡이고 아이폰 메모장에 키워드 위주의 기록을 하든 흡족할 수준의 초안 정리가 되면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러다 그 영감은 가지를 뻗는다. 이때부터는 속도전이다. 미친 듯이 뻗어나가는 잔가지들을 일단은 주워 담아야 한다. 땔감으로라도 쓸려면 나중에 정리하더라도 일단은 모아둬야 한다. 그래서 어떤 날은 40분을 달리고 30분을 기록하느라 그 자리에 땀을 흘리며 서 있던 적도 많았다. 물론 그렇게 모인 장작들에 모두 불이 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난 모으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유실되는 영감들은 계속해서 허공에 흩날렸다. 어떤 때는 신기하게도 데자뷔 마냥 같은 곳을 걷거나 달릴 때 며칠 전 날려버린 영감의 잔가지들이 떠올라 소중하게 주워 담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소중하다. 영감은 계획적이지 않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늘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는데 어떤 날은 한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경우도 있고 어떤 날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다이어리 3일 치에 나눠 적어야 할 만큼의 양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쌓여가는 영감의 장작을 모아두는 곳간은 일 년 이맘때 정리작업을 진행한다. 꽤나 많은 양이 폐기되기도 하고, 이미 글로 태어난 재료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카이빙 한다. 기록의 바탕이 되던 리걸패드와 2024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1년간 많은 역할을 담당해 주었다. 아웃풋의 한해를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주었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개인적 성장의 도모 측면에선 칭찬해 줄 만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성실한 '쓰는 사람'으로 땔감을 모르고 가끔은 태우고 날리기도 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원두막 정도는 만들어보는 2025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