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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의 양심과 기대에 대하여

채우고 비우고 설레고 흥분하며 또다시 실망하는 순환을 경험하다

by Johnstory

글 쓰는 방법을 배워도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



작법서를 보고 소설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자기 계발서도 탐독하고 인도 철학에도 빠져본다. 넘치도록 다양한 주제와 순간 떠오르는 영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어딘가에 기록도 하고 휴대전화 메모장에도 저장한다. 사진도 찍고 몇 줄로 그때의 생각을 적어둔다.

그러다 막상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아 '이제 써봐야지' 생각하지만 진도가 안 나간다. 그렇게 해서 한두 줄 끄적이고 저장만 해둔 미완의 제목들이 서른 개가 넘는다. 2년 전의 글들도 있는데, 대체 이걸 내가 뭘 쓰려고 저장해 둔 것인지 좀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제목을 쓰고 내용 한두 줄에, 이걸 왜 쓰려고 하고 언제 어떤 글로 쓰려 하는 것인지 나름의 약식 개요를 적어둔다. 그 두어 줄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대체 이런 기억력과 실력으로 글 쓰는 것으로 남은 생을 잘 나보겠다 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매일 다이어리에 적고, 노트패드와 4B연필을 들고 도서관엘 간다. 가장 구석지고 인적이 드문 인도철학서 부근 창가자리에 앉아 부족함을 채우고 새로움을 깨달음을 얻은 것 마냥 감탄한다. 500ml 생수 한통을 다 마시기 전까지 천천히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지만 일어나진 않는다.




한 줄도 쓰지 못하더라도 이런 노력이 쓰는 사람의 최소한의 양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겠지, 오늘 밤엔 아내와 아이들이 외출한 날이니 조금 고요한 곳에서 워머를 켜고 그 불빛 아래의 작은 폭 만한 감성으로 뭔가 좀 적어볼 수 있겠지 , 희망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성장의 J커브를 생각한다. 곧 임계점에 다다르겠지. 이렇게 하루하루 성실히 진심을 다해 채워가는 삶이라면 머지않아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배워왔고 경험했고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성공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일은 17년을 해왔고 마음을 먹은 글쓰기는 이제 6년뿐이 안 됐는데 이런 기대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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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과 올해 1월의 월별 조회 수, 좋은 글의 징표는 아니나 쓰는 사람에겐 이 자체가 응원이다



재능이라 생각했다. 그래, 중간 이상은 쓸 정도의 수준은 될 테니 외형적인 결과들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월 5만의 조회, 15만의 조회. 만약 블로그였다면 수익을 낼만한 글도 지난 몇 년간 써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다. 생각과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나, 그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게 쓰는 사람의 자존감이며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던 이 세계에서 난 앞으로도 계속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험들을 하게 될 텐데 자존감으로 채워진 순수한 마음이 없다면 어찌 다시 일어설 수 있단 말인가. 실패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소주 한잔 털어낼 수 있는 투지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내일에 대한 기대감 보다 나의 양심에 기대보고자 한다.

그래야 나의 휴식이 덜 부끄러울 테니, 아주 가끔은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해 주는 이들의 마음에 3분 정도는 더 머무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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