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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찐 냥이 Nov 08. 2021

무슨 일 있어요?

노란 비닐봉지가 빼꼼히 등장한다.



마치 로켓처럼 슝 하고 하늘을 날더니 세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안녕? 

쨔잔! 나도 날 수 있다고    

그림책 '나는 봉지' 

비둘기 무리 가운데 있다가도

청소부의 손아귀를 스쳐서 

빼곡히 걷고 있는 인파들 속으로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왠지 삭막한 도심의 구석구석에 혼자만 신이 난 거 같다.


그림책 '나는 봉지' 

그러다가 비를 맞아야 속절없이 바닥에 뒹굴고 발에 치이고  


동네 꼬마 아이들과 신나게 뛰기도 하고  

길 강아지의 팔베개도 되어주고  

세상 구경 신나게 다 하고 다닌다. 


노란 봉지를 보면서 내가 밥을 주는 길고양이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세상 자유롭게 보이는 존재 같을 때가 있다. 어떤 녀석은 어린 새끼를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로 보냈다고 들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성화도 하고 살갗이 까여 염증이 생긴 꼬리도 자르고 나타났다. 예전보다 자유롭게 동네를 잘 돌아다녔다. 작년에 몇 번 밥을 주었던 터라 마주치니 기억이 났었다. 사람들을 잘 피해 다니며도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보슬비가 오는데 놀이터에서 가랑비를 피하느라 미끄럼틀 아래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서 비에 젖어가는 동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림책 '나는 봉지' 
무슨 일 있어요? 

노란 봉지는

혼자 터벅터벅 기운 없이 걸어가는 여자에게 옆에 있어주고,


힘을 내요 
그림책 '나는 봉지' 

노란 봉지는 바람을 타고 바람을 연료 삼아 하늘을 고속도로처럼 달리다가  

드디어 원래 출발한 집으로 돌아온다.


다행히 작은 소녀는 그를 친구로 여겨서 다시 맞아주었다. 

이 책을 여러 번 덮었다 펼치면서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받아들여짐이었다.


노란 봉지가 세상의 참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한다.

그 얼굴들을 마주할 때 스치기도 거부당하기도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책에서처럼 노란 봉지가 힘없이 걸어가는 여자에게 안부를 묻고 힘을 내라는 말을 남긴다.


퇴근길에 나도 노란 봉지처럼 그런 적이 있었다. 머리가 무거워서  땅으로 기어들어가듯이 걷고 있던 날이 있었다.


어이! 저기요! 왜 그렇게 젊은 사람이 힘없이 걸어요? 돈 안 받으니 이거 먹어요.
 

 거리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산양 우유를 판매하고 있던 투박한 인상의 아저씨가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산양 우유 한 병을 건네 주었다. 학교 앞이라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에게 홍보를 하는 것 같았다. 본인의 생계를 위해 준비해온 귀한 것일 테인데 전혀 관심도 없어보이는 사람에게 거침없이 산양 우유 한 병을 내밀었다. 

"저요?" 

놀라서 동그랗게 쳐다보는 나를 가로막고 아저씨는 씩씩하게 건네주었다. 목소리에 힘이 가득한 아저씨에게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그때는 뜻밖이었으나, 이제는 만약 저쪽에서 바람에 질질 끌리듯 걸어오는 여자 아이를 본다면 어떠한 마음이 들지 알 것 같다.

나를 멈춰세운 그 아저씨의 우유에는 '무슨 일 있어요? 고개 들고 어깨 펴고 힘내서 걸어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때 선뜻 격려의 마음을 내밀어준 그 아저씨가 지금도 고맙다.


어쩌면 도심에서 우리는 들숨 날숨의 거리만큼 많은 사람들 속에서 경주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흔하게 마주치고 잊히는 게 사람이다 보니 기능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 사람을 알기도 전에 어느 정도 친밀해질지 관계를 먼저 재단하고 시작한다. 반대로 노란 봉지처럼 그저 그 상황의 한 사람으로 나를 대하려고 다가오는 이를 만나는 것은 어렵다.

노란 봉지가 원래 있던 곳에서 세상 여행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받아들여짐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장면이 왜 이리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봉지'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작가가 이런 말을 남겼다.


"많은 것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버려지고 잊히고 있습니다. 

가끔 살아 있는 것들도요. 모두가 일생을 충실히 살아 낼 수 있게 실패에 관대하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_ 저자 노인경 


작가는 이 책의 그림을 기본 12색 물감으로 8절 도화지에 그렸다고 했다. 육아를 하면서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아이가 자는 시간을 틈타 틈틈이 봉지를 따라 날고 꿈꾸며 200여 장이 넘는 그림을 완성했고 그중 64점의 그림을 이 책에 담았다고 했다. 거침없이 200장이 넘는 그림을 그려나갔을 작가의 모습이 상상이 됐었다.

2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대단하게 보인다. 장면마다 무심한 듯 그렸으나 충분히 공감되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그림 초보이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다지 재능이 없어서 잘 늘지 않는다.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느라 막상 손을 놀리지 않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이다. 작가가 200여 장의 그림을 혼자만의 저녁시간에 집중해서 그렸을 장면을 혼자 상상해보았다. 그렇게 열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고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수채화는 종이가 제일 중요해서 '종이가 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을 잘 다루는 것이 관건인데 그런 점에서 종이의 중요성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더불어 붓과 물감도 고가일수록 좋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것들은 나의 핑계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양심 있게 '내 재주가 80은 책임이 있는 거야' 한다.

"에잇! 이게 뭐야"

그려놓고 화를 낸다.

내 그림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못 그려서 화가 난다.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는 내가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쉽게 탓하고 싶다. 세상살이에 핑계 대고 싶은 이유는 많다. 무엇인가를 탓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이런 쓸데없는 재주가 있다니...  그런데 내 속 마음은 사실 핑계 대지 않고 싶다. 노란 봉지처럼 즐겁게 세상을 향해 날아갔으나 비에 젖고 여기저기 발길에 치여서 꼬질 하게 됐어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이 글은 브런치 북_ 어른 사춘기의 생각정리 _ chapter.1 나 정말 무엇이 되지 못해도 괜찮을까?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 글에 쓰인 책 

-나는 봉지, 글그림 노인경, 웅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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