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가
얼마 전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발가락 골절로 수술을 했다. 지금은 입원 6일째, 워낙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신체적으로는 병원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답답함만 커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오전 6:30에 항생제 주사를 맞는다.
오전 7:30에 아침을 먹는다
오전 8시 ~ 8:30 쯤 주치의 선생님의 회진
오전 9:30쯤 드레싱을 한다
오후 12:30 점심을 먹는다
오후 17:30 저녁을 먹는다
오후 20:00 두 번째 항생제 주사를 맞는다
오후 22:30 소등 및 취침
이 외의 시간에는 각자의 침대에서 알아서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보거나 졸리면 자는 3가지 행위로 장시간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ㅎㅎ
다만 코로나로 외출도 불가하고 방문객이 금지라, 유독 주변 환경에 민감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좋아하는 나는 하루 빠른 퇴원만을 바라고 있다.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다양한 탈출(?) 시도를 해보았지만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 어떤 간절한 이유에도 무쇠 같은 선생님들이 너무 야속했지만... 환자가 코로나에 걸리면 병원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해질 것이기에 이성적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다 :(
나는 4인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침대 한 개 정도는 누군가의 퇴원과 다른 누군가의 입원으로 매일 주인이 바뀌고 있다. 6일 동안 몇 명의 사람들과 같은 병실을 공유하며 타인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병원복을 입고 부위는 다르지만 신체의 어디 하나는 아픈 환자들이다. 바깥세상에서는 다들 어엿한 직장과 가정에서, 사회에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곳에서는 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모두 같은 사람들이고 성별과 나이 정도만 가늠이 될 뿐이다. 나는 병실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말을 해본 경험이 없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생겼다.
- 내 옆자리의 아이: 중학생 즈음되어 보이는데 조용하고 나이가 어려 아버지가 병원의 허가를 받고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함께 보내고 계신 듯하다.
- 나의 대각선 쪽 침대를 사용하시는 할머님: 나처럼 다리를 다치신 듯한데, 전화 벨소리가 인상적이다. 알람벨 같은 커다란 벨소리를 사용하고 계신데, 전화를 받으시면 친구분들에게 어떻게 다치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떤지, 또 어떤 간호사가 주사를 발 놓는지 이야기하시곤 한다.
- 얼마 전 퇴원하신 아주머님: 누구에게나 말을 잘 붙이시는 것 같다. 나의 옷이 비틀어져 있으면 내쪽으로 건너오셔서 꼭 말씀해주셨다. 또한 둘이서만 병실에 있는 경우가 생기면 병원 생활이 어땠는지 내게 쉼 없이 말씀해주시곤 하셨다. (사실 조금 힘들었다...ㅠ.ㅠ)
모든 타이틀과 겉옷을 집어던지니 병실 안에서 사람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각자의 행동과 말 뿐이다. 간호사를 대할 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전화통화를 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른 환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 행동과 말에 의해서만 타인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적 지위, 직장, 가족관계 등 많은 외부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생성되고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나의 표면을 더욱 화려하게 가꾸는 데에만 치중을 하는 경향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모두의 환경적 조건이 동일한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화장을 벗겨내고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오직 언행만이 각자에 대한 인식을 자아내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오늘 퇴원을 빨리 시켜주지 않는 의사 선생님이 과잉 진료를 하는 것 같다, 병원 서비스가 별로이다 등 툴툴대는 전화통화를 함으로써 나의 민낯을 보인 것에 살짝 부끄러워지는 마음과 함께,,, 결국 사람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누적된 삶을 통해 형성된 언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깥세상에서도 나의 내면을 잘 가꾸어, 민낯을 드러내더라도 고운 언행이 비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병원에서의 6번째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