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유(思惟)를 표현하다.
한국인의 말하기는 은유와 생략의 돌려말하기다.
업무적으로 이메일을 쓸 때, 항상 붙이는 말은 '확인 부탁 드립니다.'
무엇을 어떤 방면으로 확인을 해야 하는지는 받는 자가 찰떡같이 알아야 한다.
중국어 어학연수 시절, 같이 버스를 타고 가던 한국인 동생이 말하길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스와 노를 단호하게 표현하게 되면서 한국에서 친구들과 말할 때도 그런 경향이 생겨서 중국어로 말하듯 한국어로 얘기하니 친구들이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예로 들면,
이거 먹을까? 아니 싫어.
이거 예쁘지? 아니.
나의 생각을 간결하고 뚜렷하게 말하면 항상 딸려 나오는 반응들이 있다.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지마."
"함부러 말하는 거 아니야?!"
"네 생각이 다 옳은 건 아니야."
학생 때는 진짜 내가 그렇나 싶어 이와 같은 반응에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서른이 넘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나만의 사유과정을 재검토하고 더 다듬어 갔다.
잠자리에서 뒤적이며 사유를 정리하던 수많은 밤들을 거쳐 명료한 나만의 생각들은 대화 속에 묻어 말해져도 여전히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우습다.
아니꼽다.
대화 속에서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하지만, 이 한 문장을 결론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사유를 했는지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고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내 생각이 진정 단정적이고 독단적이면 그에 대한 당신의 반박을 대고 난 그래서 네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깔끔하게 말해줬으면 한다.
십여년 전 가볍고 청아한 목소리와 곱상한 외모를 가진 한 친구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상처가 떠오른다.
너무 생각없이 말하지 마라고 자주 듣는데, 난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든. 은근 상처받더라.
내 기억 속의 그는 오히려 체면, 눈치보다 이로 인해 놓치고 있던 본질적인 의문을 가볍게 던지는 편이었다.
말 대신 글로 표현할 때는 덜하다.
독자들은 글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최소한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결론내게 되었니 궁금해하고 읽어준다.
이 잠깐의 관대함이 나로 하여금 글쓰기를 놓을 수 없고, 내 사유를 표현하고 싶게 만든다.
오늘도 나의 사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에게
난 오늘도 펜으로 투쟁을 한다.
그리고 이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