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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성찰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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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Jan 24. 2018

단 한 사람.

시인의 사랑 속에는 누가 있었을까?

'양익준'의 이름은 독립영화 '똥파리'의 흥행을 알리는 TV 뉴스에서 처음 들었다. 감독과 주연배우를 동시에 맡은 영화 똥파리의 흥행은 어쩌구저쩌구. 그렇게 스쳐지나갔던 이름이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의 등장인물 소개란에 쓰여 있었고 올라온 사진을 통해 그의 얼굴을 처음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처음 등장하던 회차에서 상상이상의 폭력적인 역할에 순간 채널을 돌려 버렸던, 그 양익준 배우의 연기를 기억하는 이라면 그려지지 않는 감성 충만한 시인역을 맡은 영화라 의아함 반, 호기심 반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제주도 남서쪽에 위치한 산방산 아래 마을을 배경으로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하여 아내(전혜진 분)의 경제력에 기대어 살고 있는 시인(양익준 분)은 집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 세윤(정가람 분)을 만나게 된다. 거침없는 질풍노도의 18살을 보내는 세윤의 아찔함에 놀라는 한편, 달달한 도넛을 잔뜩 사들고 돌아가는 시인의 뒷모습과 어그적거리는 걸음걸이는 배우의 전작에서 오는 무서움을 단박에 지워버렸다.

 
영화 초반은 깔끔한 우스꽝스러움과 유머러스한 대사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쉽게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동시에 현실의 씁쓸함을 잘 버무려 차분한 화면과 같은 톤을 유지한다. 단 것을 아주 좋아하는 천진한 시인이지만 등단 이후 이렇다할 작품이 없는 상태로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도 주눅들어 자리를 지킬 뿐이고, 아내 또한 처음 시인을 뒷바라지 하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했지만, 혼자 가계를 책임지는 삶에 점점 지쳐가며 간간히 시인에게 그 짜증을 드러내고 있다. 결혼한지 몇 년이 되었지만, 둘 사이의 아이가 없는 상태로 서로에게 지쳐가는 부부의 현재이다.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시인을 알게된 소년 세윤은 학교 자퇴 후,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문제아의 행동을 일삼는 이다. 성이 난듯한 눈빛을 지으면 사람들은 모두 그에서 한 발 물러서지만, 시인이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내면은 가정에서 상처 받은 마음과 답답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시인에게서 돈을 갈취해 가는 언행이 오히려 세윤이 진심으로 깊이 상처받았음을 나 또한 느끼고 슬프게 한다.


시인은 풍성한 감성으로 상상을 하고 글을 짓는다. 세윤은 거동 못 하는 아버지를 어려서부터 옆에서 살뜰히 보살펴 왔다. 서로를 보살피는 스토르게 형태의 사랑으로, 영화에서 시인은 세윤에게 어떠한 성적인 농담과 터치를 하지 않는다. 존재 대 존재로서 얘기하고 감성을 나누며 서로를 연민한다. 아버지에 대한 숨겨둔 추억을 들어주고, 곶자왈에 버려진 검은 봉지에 죽은 개가 들어있을 거란 남에게 비웃음 살만한 상상을 받아준다.

반면 시인의 아내는 많은 대사가 일종 섹드립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이를 갖고 싶어 시인에게 시험관 시술을 종용하는, 통상 사람들이 말하는 에로스적 사랑을 표현한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섬세한 감성은 여성의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故신해철 이후 들어보지 못한 남성의 사려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우리의 고정관념을 치환한다. '내가 죽어야 쟤가 산다'며 식음을 전폐하다 돌아가신 세윤의 아버지, '대학을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해주는 시인,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이들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짓는 세윤. 그들의 감정선과 대비되게 여성 인물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며 호상이라 말하고 장지 가는 버스 안에서 손가락에 침 묻혀가며 부조금을 세는 세윤의 어머니, 소유적 사랑을 헌신이라 착각했던 아내가 시인이 세윤에게 쏟은 사랑을 알자 그와 마주하며 내뱉었던 '네까짓께'라는 말이 초라함을 알기에 스스로의 감정에 매몰되어 자기 연민에 갇혀있다. 


세윤은 결국 말한다. 영화에서는 둘의 대화를 들려 주지도 않고, 조금 먼 거리에서 아내와 세윤을 프레임에 담아내지만,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거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미래를 그려주지 않고 엄마도 이 자리에 주저앉으라 했지만, 단 한 사람, 시인만은 그에게 같이 떠나자고 해주었다. 이리 진심어린 위로를 받은 세윤은 그가 받은 사랑만큼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사랑을 양보하였다.  


까르르 웃음과 함께 시작한 영화가 엔딩 크래딧을 올릴 때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떠한 존재에게 이리 담뿍 사랑을 쏟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 존재의 상처받음에 아파 같이 울었던 적이 있는가?
로맨틱함, 키스, 섹스가 아닌 마음의 울림으로 사랑을 주고 받은 적이 있는가?
담담하게 그려진 한 편의 아주 잘 정제된 사랑을 보며 먹먹한 감정에 싸여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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