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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성찰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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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Dec 26. 2020

과거의 기억을 넘어 시간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 영화 시월애(時越愛)

코로나의 기습으로 집에 머무르며 홀로 연휴를 보낸 2020년 크리스마스. 그동안 회사일에 쫓겨 한 켠에 저장해두었던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난 고독한 도시의 예술가를 꿈꾸고 있으니,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볼까, 초록 초록한 화면의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을 볼까? 그러다 스크롤을 밑으로 쭉쭉 내리다 '시월애'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고 이끌리듯 주저 없이 클릭하여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은주(전지현 분)와 성현(이정재 분)이 바닷가에 외따로 지어진 일 마레라는 집 앞 우체통을 통해 1997년과 1999년, 2년의 시간을 넘어서 교감을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를 살던 내가 생각났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재생시키는 CD 플레이어, 핸드폰이 보급화되기 전이라 집 전화벨이 울리면 뛰어가서 받았던 기억, 광화문 지하도 앞 전화부스들, 수능 끝나고 알바했던 만화방, 귀에 걸던 동그란 이어폰, 아버지의 월급봉투. 그리고 풋풋했던 주연 배우들의 젊은 시절까지 오래전 지나간 세기말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은주와 성현의 이야기를 보았다.


지금은 사라진 물품들이 많았지만, 사람의 감정과 교류는 오히려 크게 다르지 않다. 유학으로 인해 연락이 뜸해지다 연락두절된 연인으로 인해 갑자기 싹둑 잘라낸 듯 끝나버린 연애이지만 멈출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힘겨워하는 자, 자식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애증, 사랑하게 되었는데 나를 모르는 과거 속의 사람, 그때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 나를 흔들고 지탱해 준다.


멜로 영화를 선호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자마자 바로 플레이한 이유는 나의 사랑이 매듭지어지지 않아서였다. 나를 모르는 자신의 시간 속 은주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던 성현처럼, 갑자기 잘라내어 버린 연인의 태도에 차마 멈춰지지 않는 사랑이 힘든 은주처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은 그 시점에 멈춰 있으나 2년의 시간을 넘어가 있는 오늘의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다 눈물을 적신다. 내가 바로 서 있어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영화의 대사가 틀리지 않다 생각하지만 오늘만큼은 씁쓸하다. 내가 나로 존재하려 발버둥 치면 칠 수록 모진 풍파를 맞으며 고집스레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방파제의 기둥이 되는 거 같다. 하루 일상을 열심히 살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모두 잠든 밤에 기억 속 남아있는 그대를 떠올리며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웅크리다 새벽이 달리는 무렵 얕게 잠드는 셀 수 없는 밤의 끝은 우리는 인연이 아니였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우체통을 통해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던 둘은 고향으로 내려가 휴가를 보내려는 은주의 제안으로 2000년 제주도 고향집 근처 어느 해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은주가 힘껏 페달을 밟아 도착한 그 해변에는 집을 지으려는 공사장 사람들로 시끄러울 뿐이고, 오후 나절 내내 해변을 거닐던 은주는 끝끝내 성현을 만날 수 없었다. 의아해하는 성현의 자상한 편지에도 이미 상처 받은 마음이 아팠던 은주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유학 가서 만난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을 말하는 전남친을 보게 된다. 정리되지 않았던 사랑에 은주가 그 동안 누르고 있던 슬픔이 기어코 터져나와 흐느끼는 눈물로 적은 편지를 받은 성현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를 위해 유학을 떠나는 전남친을 마지막으로 만나는 은주의 과거 어느 날 약속 장소로 나가기로 한다.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성현이 마음에 걸렸던 은주는 그가 다니던 대학교 사무실로 찾아가 그의 근황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다 알게 된 대학 사무실에서 있던 성현의 친구가 은주에게 알려주는 성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식. 자신이 부탁했던 약속 장소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말에 놀라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 일마레로 달려가는 은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다 헤어짐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나 살아가며 겪는 여러 일 중 하나이다. 연애의 마지막은 말이나 행동으로 보이지만, 마음속 사랑이 정리되는 시기는 제각각이다. 은주는 잠수 이별을 한 전남친에 대한 사랑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성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랑을 마음에 담으려면 이전의 마음을 비워야 했지만,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다가온 새로운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동안 마음에 잔류했던 지난 사랑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조금씩 희미해지며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최면을 걸었던 나의 혼잣말이 사라지고 마음과 기억을 고이 접어 한 켠에 봉해두었다. 살아가다 다시 마주하게 되어도 이제는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칠 수 있는, 그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만을 표현할 수 있는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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