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눈이 펑펑 내려 가기 힘든 길을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남자가 있다. 반드시 가야 하는 그 곳에는 그가 오랜동안 그리워 했던 이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쏟아내리는 눈보라를 헤치고 정차한 버스에서 내리자 들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가 역시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 그들 외 손님이 없는 외딴 산장에서의 저녁은 추운 날씨에도 벽난로의 온기가 더 와닿게 마음을 데웠다.
탁.
읽던 책을 덮었다. 알 수 없는 이들의 애틋함이 와 닿기보다 불륜인가 의심부터 드는 현실의 진흙탕이 떠올랐다. 글에 몰입할 수 없어 도서관 서가에 도로 꽂아두려다 표지를 보았다. 예쁜 옛날 유럽 여인들이 드레스를 입고 맵시를 뽐내는 드레스룸의 모습이다. '박민규 장편소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두어권 읽어봤는데 무덤덤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책 표지 사진이 이상하리만큼 눈을 떼지 못 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표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책은 언젠가 꼭 읽겠구나, 다만 지금은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서가에 책을 도로 꽂았다.
다시 이 책을 만난 건 동네에 갓 오픈한 프렌차이즈 중고서점이었다. 상태가 좋은 A급으로 분류되어 꽂아있던 책을 난 서가에서 꺼내어 또 다시 표지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다 구입을 했다. 남자는 여전히 눈보라를 헤치고 가서 여자를 만나고 둘만의 애틋함을 나누다 남자는 여자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되는 챕터에서부터 내용의 결이 바뀌며 가족에 대해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남자의 서사가 시작되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다. 어린 시절 남자와 함께 집에 있으며 거울 앞에서 연기 연습을 하기도 하고 무술을 연습하다 식당 일을 마치고 오는 어머니를 맞이하는 나날을 보내었다. 훤칠하게 잘 생긴 아버지가 길을 걸을 때면 주변이 술렁이었다. 살짝 뒤떨어져 걷는 어머니와 앞서 걷는 아버지를 보며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박색인 어머니와 미남인 남편는 나란히 걷지 않았던 걸까, 걸을 수 없었던 걸까. 어느 날, 펑크난 어느 단역의 대타로 들어갔던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20년의 세월 끝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자 아버지는 미혼 행세를 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돈봉투를 주며 자신을 위해 이해해 달라 했다.
그 때부터였다.
어머니의 표정에 영혼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질 수도 있음을.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마주한 어머니에게서 사람의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모습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병원 한 켠의 침대에 누워 있던 어머니를 위해 강릉에서 이모가 올라왔다.
침상에서 어머니가 처음으로 꺼낸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에 이모와 함께 강릉으로 내려갔다 남자는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강릉에서 이모와 함께 식당을 하기로 하셨다. 한동안 연락되지 않아 걸려오는 친구들의 전화를 받았고, 함께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기도 하고, 소설을 쓰기도 했다. 집을 비운 사이 들어온 고양이와 함께 침잔하듯 누워 있기도 했다. 사회 집단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상태로 맞아버린 19살이었다.
친구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 주었다.
주임이 신상에 대한 몇 가지 질문 후,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사이라고 사람들에게 남자를 소개하였다. 처음 보았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봐온 여자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 못 생긴 얼굴을 가진 여자를. 동시에 남자의 귓가에는 요들송이 울려퍼졌다. 백화점 내에서 여자에 대한 평가는 그저 아주 못 생긴 여자였다. 그 이유만으로 뛰어난 성적으로 입사하였으나 사무직이 아닌 현장으로 근무처를 배정받았고, 점심 시간에 혼자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으며, 많은 짐을 들고 다녀도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건물 내부와 일하게 될 장소를 안내받고 같이 일하게 된 요한과 친해졌다.
한가한 지하 4층 주차장에서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요한은 유쾌하게 자신만의 정의된 단어와 표현으로 신랄하게 말하며, 더이상 반박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드는 이였다. 일과가 끝나면 으레 그와 맥주를 Bear로 적혀 있는 '켄터키 치킨'에서 술 한 잔을 걸쳤다. 보름마다 로테이션 되는 근무지는 지하 4층 주차장으로 고정되었다. 예쁜 엘레베이터 걸에게 껄덕이는 경비원과 박스가 무겁다고 앙탈부리는 예쁘장한 여직원과 이를 보고 실실 웃으며 도와주는 남직원들 사이에서 간간이 혼자 힘겹게 박스를 나르는 여자를 보았다. 무거워보이는 더 많은 짐을 나르고 있어도 어느 누구도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바람에 날라가는 길가의 신문지처럼 아무도 관심있어 하지 않았다. 가을의 오후, 주임이 다가와 기념품을 문화센터로 가져다 달라하며, 두 명이 가야할 정도의 짐이라 여자에게 같이 가라 권했다. 어느새 남자는 여자와 각자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앞장서 걷던 아버지와 떨어져 걷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이러했을까. 쉬어가기 위해 잠시 쇼핑백을 내려 놓으며 여자의 땀이 보였을 때, 여자가 나랑 비슷한 무게의 짐을 들고 걸어왔음을 알았다. 늦을까 더 오래 쉴 수 없었기에 다시 쇼핑백을 집을 때 한 손에 세 개씩 더 들었다. 당황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남자는 걸으며 말했다. "여자가 들기에는 너무 무거워요." 최초의 친절이었다.
남자는 그저 출근하고 퇴근했을 뿐이었으나 주변 또래 여성들의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하였다.
요한이 알려준 소식에도 남자의 표정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진지하게 묻는 요한에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에 대한 것도. 저녁에 '켄터키 치킨'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는 이어졌다. 저 친구는 달라. 그냥 사는 게 힘든 애야. 사랑이 아니라면, 연인으로 같이 길을 걷는 것을 너는 부끄러워 할거야. 요한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나 남자는 머리 속에서 울리는 요한의 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여지없이 일어나 백화점으로 출근을 하였다. 평소보다 1시간 이르긴 했지만. 청소와 함께 구령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는 직원들 사이로 여자가 보였다. 사람들을 스쳐 여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랑 친구하지 않을래요?" 여자는 놀람과 동시에 도망갔다.
요한은 점심시간에 김밥과 콜라는 던져주고는 7시까지 '켄터키 치킨'으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사라졌다. 책을 읽고, 일을 하고 일과를 마친 뒤 혼자 김빠진 맥주처럼 '켄터키 치킨'에 앉아 있었다. 요한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뒤에는 여자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표지를 보았을 때부터 문득 떠올랐던 알 수 없었던 이끌림이 용납되었다.
내 안에는 비틀린 괴물이 살고 있다. 스스로 추악한 죄의식이라 명명한 비대한 덩어리에 눌려있다.
이를 들킬까 항상 두려웠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열어서 보여 줄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외모로 표현되었던, 나에게는 거친 워딩과 톡 쏘는 말투로 논리적으로 대꾸하는 직설화법으로 대체되는 추(醜)함을 나는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서워 하거나 어려워했다. 불편한 존재가 되었으나 신경쓰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라 착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이 문장을 읽자 숨을 쉴 수 없었다. 눈물이 고였다.
사실 나도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내 안에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냥 '아? 그래?!' 라고 말하고 받아줄 수 있는 한 사람을 간절히 찾아다녔으나 아무도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다. 사실은 어느 누가 용기있게 다가와서 마음을 살며시 두드려도 여전히 나는 추(醜)함을 걸치고 고함치며 꺼지라고 하고 있었다. 남자가 대학에 진학하고, 요한이 자살기도와 함께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아무말 없이 사라진 소설 속 여자처럼 나 또한 겁에 질려 도망갔다. 도피 끝에 낙원이 없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내가 가는 것이 도망인지조차 알지 못한채 미지의 안전지대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소설의 결말은 모르겠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나를 돌이켜 보려 한다. 내키지 않았지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세상의 가치를 좀더 받아들여보려 한다. 나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지 않았는지 다시금 짚어보고 싶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추(醜)함이 세월에 조금씩 바래져 가며 이제는 괜찮다고, 그저 조금 슬플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 본문 P140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