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other reason. 영화 변산.
영화 시작과 함께 발레파킹,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고시원 골방에 앉아 열심히 랩을 연습하고 쇼미더머니에 지원하는 주인공 MC심뻑, 학수를 보면서 영화 8 mile의 에미넴의 랩 배틀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 영화가 8 mile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예상을 했으나 그건 엄청난 오산이었다.
학수(박정민 분)는 고향에서 도망쳤다. 당시 그에게 고향은 엄마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아버지와 자신의 습작 노트를 훔쳐 베끼고 짜집기 한 시로 등단한 선배에게 시달리던, 폐항이라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서울로 와서 가족 관계를 물으면 고아라 하고 사투리 억양을 지적하면 서울 출신이라 말하며 10년을 살았다. 금의환향하겠다는 그의 다짐과 다르게 현실은 여전히 알바를 하며 좁은 골방에서 곡을 만들며 연습하는 무명 랩퍼이다. 병원에서 온 수상한(?) 전화 한 통을 받고 누구와 연락조차 않고 10년간 발길을 끊었던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역시나 그에게 당분간 무조건 고향에 머물러야 하는 옘병같은 상황을 선사해준다.
겉으론 여전해 보이는 고향이지만, 과거에 같이 시간을 보낸 이들은 달라있었다. 예전의 기억으로 그들을 대하는 학수는 당황스럽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지역 유지가 되는 코스를 밟으려는 선배, 기억에도 없는 여자동창과 첫사랑의 그녀, 어릴 적 만만히 보고 괴롭혔으나 지금은 지역 건달이 되어 있는 동창놈과 이리저리 휩쓸리며 떠나기 전과 같이 상황에 끌려다닌다.
그런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상하다. 나만 내뱉고 싶었던 말을 한숨과 함께 삼키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도 그런거 같다. 아버지도, 용대도, 선미도 그런 거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두고 발길이 돌아서지 않는다. 어차피 말해봤자 변하기는 커녕 듣고 코웃음을 칠 거 같았는데 아닌 거 같다. 노래방에서 폭풍 랩핑을 하고 참다참다 기어이 터진 선미의 말에, 터덜터덜 발길 닿는 대로 걷는 뒷모습에, 자기가 썼다고 건내 준 그의 소설책에, 생각보다 많이 아픈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내가 무엇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보려 하지 않고 외면했던 것들인가보다.
모든 진실을 아는 자는 그냥 묵묵히 지켜봐주었고 기다려 주었다. 이제는 두 눈을 부릅 뜨고 용기를 내어 두 발에 힘을 주고 땅을 내딛어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이 영화는 난장판이다. 뒤죽박죽 엉키어 철퍽철퍽 진행된다. 지켜야 할 규범도 시릴듯한 냉혹한 현실도 서릿발같이 내려치는 권선징악도 기승전결의 깔끔한 전개도 없다.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도 마지막 엔딩크래딧을 볼 땐 알 수 없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인생에서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해결되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면 투닥투닥 땅땅땅 두루뭉실하게 정리하고 지나간다. 어릴 때는 수학 문제의 답처럼 모든 일에는 정답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수학을 배우니 정답은 교재 안 문제에만 존재하였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면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기계의 인풋 아웃풋이 더 명료하다. 사람이 얽이면 옳다 그르다 쉽게 말하기 힘들며, 황희 정승처럼 '너도 맞고, 너도 맞다.'는 경우를 자주 마주한다. 무언가가 딱딱 맞아 떨어져서 정확하게 굴러간다는 환상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주 망각한다.
영화 '변산'은 이러한 우리의 망각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래~ 삶은 그런거지~ 라는 우스움말이다.
사족으로 영화에서 부르는 랩 가사와 나레이션같은 랩 가사 모두 박정민 배우가 만들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잡지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고 책으로 묶어서 낼 정도로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나는 쇼파에 앉아 책을 읽는 컷에서 그에게 반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