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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Mar 14. 2019

내가 알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찜통열기로 가득했던 여름의 어느 날, 계획대로였다면 여름의 한 복판에 섬진강을 끼는 어느 마을에서 만나 씨익 웃으며 조우했을 A양에게 몸살이 났다는 소식을 보내게 되었다. 상냥함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 고마워하며 안부를 묻자,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환한 답문이 왔다. 막막히 깊어가던 새벽녘 아스라이 읊조리던 간절하게 원했던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축하를 건네고 카톡을 닫고 나서 다시금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랑은 무엇일까? 실존하는 것일까?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은 순도 100%의 진심일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라는 존재를 사랑한다. 이는 가장 순수한 감정이며 사랑을 느끼고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전달하고자 고백하는 그 순간은 가장 용기 있고 행복하고 솔직한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나의 고백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변화의 강에 던져진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이지만, 순간을 인식하고 살아간다. 지금의 나는 크게 베어 먹고 있는 감자 핫도그가 제일 맛있지만, 1시간 후에 이 감자 핫도그가 체해서 게워내다 내일 아침에는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피어오르다 사그라들고 쉬이 변하는 감정과 생각에 얼마나 믿음을 주어야 하는가?  


3년 전에는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사랑을 정확히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의문이 든다. 내가 느꼈던 사랑은 순간에 취해 뱉어졌던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이 아녔을까? 1초1초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신체가 늙어가고, 경험이 쌓이고, 기술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어간다. 외국인 앞에 서면 얼었던 내가 이제는 내 생각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듯 모두가 멈춰있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심지어 같이 어우러져 발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점성술사의 수정구 속 연기처럼 어질러지듯 섞이는 흐림같이 우리는 변화를 부대껴가며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사람이, 사회가,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는데 사랑만은 그 자리에서 변치 않아야 한다??


내가 배웠던 사랑은


어린 시절 즐겨봤던 만화영화 속에서는 야수와 함께 노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벨과 호박마차를 타고 왕자님을 만나러 가던 신데렐라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사랑에 빠진 왕자님과 행복하게 결혼을 하며 끝을 맺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보아온 TV 드라마 속에서도 이러한 사랑이 오늘을 배경으로 비스무레 그려지고 있었다. 뚱뚱하고 노처녀인 파티셰와 사랑에 빠지는 부유한 레스토랑 사장님, 가난한 스턴트우먼과 사랑에 빠지는 재벌 3세, 심지어 400여 년을 살아온 외계인과 900여 년을 살아온 도깨비까지 등장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한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남자가 바닥으로 추락한 여배우와 고아인 여고생을, 비록 현재 조건은 남루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여성을 매우 사랑한다. 얼마나 열렬히 깊게 사랑했으면, 그 여성을 위해 자신의 부는 물론이요 목숨까지 버리려 한다. 한 사람만을 목숨 바쳐 사랑하는 순정. 이것이 책을 통해, 드라마를 통해, 영화를 통해 아주 고귀한 가치라 아주 오랫동안 학습되어 왔다.


사랑은 '빠지다'라는 동사를 쓰기도 한다. 이는 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마치 내 삶에서 예정되어 있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같이 느껴진다. 평탄하게 때론 지루하게 어떨 땐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서 어느 날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운명 같은 사랑을 하는 예술작품 속의 주인공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행복한 결혼에 이를 것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영원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이리라 여기며 살아왔다.


현실의 사랑은


보통의 두 남녀가 어떠한 계기로 서로를 알아가다 호감을 가지게 되어 교제를 시작한다. 일상을 살아가던 시간 중에서 조금씩 서로에게 할애하여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간다. 연애를 하고 있지만, 일상을 잠식하진 않는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정해진 시간까지 등교나 출근을 한다. 일상의 시간 한 부분을 떼어내어 상대와 공유하기에 연애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변하진 않는다. 다만 나의 세계가 지각 변동할 뿐...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가고 서로의 생활 습관을 알아가며 맞추어가는 연애 기간을 통과하여 어느 정도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직업을 갖게 되면 결혼이라는 관문 앞에 도달한다. 이제는 둘만의 문제가 아닌 양 쪽 집안의 조율로 번지게 된다. 예물, 예단, 혼수 등과 같이 당사자는 안 해도 상관없는 것들을 가지고 어른들께서 기싸움을 하신다. 이 과정에서 결혼이 깨지기도 하고 어른들의 권리 주장 때문에 당사자가 배제된 과정이 생기기도 한다.


이리 힘들게 결혼을 하고 나서 시작되는 결혼생활 또한 다르지 않다. 시댁과 처가댁이라 불리는 배우자의 집안에 적응해야 한다. 이래서 결혼할 때는 서로 집안 분위기를 봐야 한다, 각자의 부모님이 배우자에게 어떻게 하는지 봐야 한다, 차이나는 결혼은 이래서 힘들다는 둥 시집살이와 처가살이라는 말이 얼마나 매서운지 알게 해 준다. 여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까지 동반되어 어느새 남녀 간의 사랑은 안드로메다로 가고 삶에 찌든 자들의 전우애만이 남는다. 그렇게 한 세월 자식을 키우고 어른으로 키우면 어느새 늙어버린 나와 배우자만이 남는다. 


도대체 내가 학습해온 사랑과 현실에서의 사랑은 이리 다른데 왜 사랑이 세상 모든 가치를 포괄하는 것처럼 말할까? 그냥 인간이 믿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 온 환상이 아녔을까?


내년의 벚꽃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어.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서 읽었던 글귀가 문득 떠오른다. 과하지 않게 차오른 마음을 이리 표현했나 생각했으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랑은 선택이며 그 선택의 결정은 순간에 기반한다. 우리는 3차원의 존재이기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만 있을 뿐, 앞으로 펼쳐질 시간에 대해 조절을 할 수도 없고 변화를 예측할 수도 없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재 시점(時點)에서는 유효하지만, 지금부터 앞으로 살아갈 무한의 시간(時間)까지 사랑한다 보장할 수 없다. 내년의 벚꽃이 필 때쯤에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길 그저 노력할 뿐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은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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