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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Dec 31. 2018

나의 라이벌에게...

삶은 치열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쓸데없는 과정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고3 때 수능을 위해 읽었던 문제집 속의 수많은 문학작품들의 발췌가 뇌리에 남아 나의 세계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때 읽어던 문구와 불러일으킨 감성이 기억에 남아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작품을 찾아가게 만든다. 한창 평화로운 중고카페에서 책을 직거래하여 소장하는 기쁨을 만끽하던 때에 어느 분이 올린 책 목록이 참 맘에 들었다. 2시간 동안 버스 여행을 하면서 책을 무겁게 들고 오는 내내 마음만은 뿌듯했었다. 집에 와서 무엇을 읽을까 살피다 깔끔한 표지의 책을 발견하고 페이지를 열었더니 오랫동안 마음 속에 봉인해놓은 작가의 이름이 찍혀있다. 전혜린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문학시간에 선생님께서 말해주신 짧지만 강렬했던 그녀의 삶을 흘려들으며 1페이지만 발췌된 글에서 한 문구가 뇌리에 박혔었다. 삶은 치열해야 한다. 작가의 이름 앞에 붙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간' 수식어와 잘 어울리는 글의 나열이었다. 쓱~ 교과서를 읽는 고2의 나는 대학 입학과 함께 펼쳐질 20대의 나날들이 그녀의 문구처럼 더 크게 타기 위해 하늘을 향해 출렁이는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 낼 것이라 조금의 짐작도 없었다. 삶의 무료함에 그냥 죽어버릴까 고민을 하던 나의 10대의 끝자락에서 만난 그 문구는 사색-이라 쓰고 공상이라 말한다-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색을 좀더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는 문구였을 뿐이었다.


어느덧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더 이상 태울 연료가 없어 가라 앉아 연홍빛의 불빛만이 남았던 시기에 그의 수필집을 읽게 되었다. 삶의 고난으로 점철된 날들을 희희낙낙 살아가는 척하던 일상에서 처음에는 잿빛 가득한 낯설은 독일 뮌헨의 묘사에 자연스럽게 끌려들어 갔다. 머나먼 어딘가로 현실을 피해 도망가고 싶었던 나는 여유있게 한 페이지씩 넘기며 그의 사고가 가득찬 글을 읽다가다 어느 페이지에서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어떠한 책을 읽어도, 밤이 하얗게 새도록 머리 속에서 사고를 해도 항상 넘을 수 없었던 얇은 습자지 같은 막을 이립(而立)도 되지 않았던 그녀가 훌쩍 뛰어 넘어 내가 꿈꾸던 사유의 단계에 편안히 내려 앉아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약 50년의 시간의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인터넷이라는 혁신적인 문명의 이기(利器)로 어느 시대에도 누리지 못한 정보의 범람이 넘치는, 사유의 재료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넘어가려 애를 쓰고 안달내 봐도 갈 수 없었던 그 사유의 층계에 앉아 그는 글을 남겼다.


패배감과 함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시대가 낳은 천재인가? 저 곳이 불과 스물 몇 살의 젊은이도 닿을 수 있는 곳이었던가!

무언의 감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질시(嫉視) 라는 생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이 낯설고도 강렬한 감정은 호승심(好勝心)으로 번져 갔다.

여기서 지기 싫다! 그는 이미 죽음의 영면에 들었지만, 난 살아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그와 같은 글을 쓸 수 있다!


영원히 31살이라는 나이에 박제되어 버린 나의 라이벌은 여전히 그 층계에 앉아 나에게 손짓한다.

그가 살지 못한 시간을 더 살아갈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흥! 콧바람을 내뿜는다. 이리 흥흥대다 어느 날 스리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그와 같은 층계의 옆자리를 앉으리라. 매우 높은 그 층계까지 올라가기 위해 사유의 역류에서 건져낸 나의 글로 채워진 무수한 장 수의 종이를 쌓아 나만이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 것이다.


그 때까지 그 곳에서 안녕하길 바란다, 나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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