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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Jan 07. 2019

내 어릴적 꿈은?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다

빈부의 차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던 초등학교 고학년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 주셨다. '부모님께 어렸을 적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세요~' 학원에 띵뚱띵뚱 피아노를 치고 나서 신나게 보물섬을 보다 엄마가 올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온 초딩은 그 날도 퇴근하면서 구두를 벗고 있는 아빠에게 후다닥 달려 나가며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물어봤다.


아빠~ 아빠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구두를 벗다 시끄러운 제비 새끼같은 자식의 질문에 아버지는 평소처럼 나긋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응?! 아빠는 맨날 양복 입고 구두 신고 회사에 출근하는데?? 꿈이 회사원이 아니였나?? 이상하다? 이상한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린 아이의 머리 안에 처음으로 작가라는 직업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의식의 씨앗이 심어진 날이었다.


세상물정에 어느 정도 눈에 뜬 중학생 시절, 하루는 곰곰히 앞으로 뭐가 될까 고민을 해 봤다. 당시 피아노를 배운 영향으로 음악에 자신감이 붙던 나는 대중음악작곡가와 신문에 연재되던 은희경, 공지영 작가님의 글을 챙겨 읽던 영향으로 작가에 흥미가 갔었다. 하지만 어른들이 흔히 하는 이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예술하면 배곯는다. 


학급 구성원의 빈부 차이가 매우 큰 초등학교를 다녔기에 가난의 비참함이 어떤지 중학생의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조별 과제를 하려고 다른 친구네 가면 번쩍이는 아파트나 커다란 3층짜리 단독주택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사시사철 곰팡이 피어난 지하실 방에서 살던 나를 주눅이 들게 만들곤 했다. 가난하면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했으나 더 비참한 것은 나 스스로가 가난하다는 틀에 갇혀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하는 마음이 생기기 힘들었다. 가난은 꿈을 정하는데 있어 스스로 한계를 긋게 하였다.


결국 나는 회사원이 되기로 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고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회사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과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공부를 잘 하게 되면 나랑 가까운 동네에 사는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가 당하는 그 경멸에서부터 최소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되어 반 아이들의 괴롭힘을 막아주었다. 게다가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성적은 당시 나의 삶 자체를 지배하는 가치의 척도가 되었다. 대학을 못 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에 그만큼 성적에 목을 매었다. 이렇게 나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관찰하고 생각해야 할 시기를 문제 몇 개를 더 맞추는가 못 맞추는가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 시기에 내가 한 것은 내일의 시험에서 문제를 다 맞추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을 참는 인내뿐이었다. 나중에 대학가면 하자며 내 안에서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막고 독서로 눈을 돌려 외면했다.


내 안의 진실된 바람을 외면한 댓가였을까? 나는 직장을 얻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 소위 스펙이라 불리우는 것들을 갖추는 것도 매우 어려웠고, 어렵게 면접 기회를 잡아 보게 되면 떨어지기 일쑤였다.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나는 자괴감이 마음을 좀먹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다 30대가 목전에 다가오는 어느 날, 꽤 심각하게 앞날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였다.

나는 왜 취직을 해서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가?


몇 달 동안 심각하고 밀도있게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에 몰두했었다. 그리고 나서 취직을 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를 찾아내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친분을 위한 관계 안에서는 그렇게 날 것의 감정을 보기 힘들기에 사람들이 이익에 얽혀져 있었을 때 나오는 생존에 대한 행동들을 보기 위해서는 밥줄이 달린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관찰이 필요했다. 그 때부터 구직을 하는 나의 자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일을 하는 것이 간절했던 것은 나이니까... 그러다 출근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나의 사회 생활이 시작되었다.


업무를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의 지식을 배워가는 건 힘들었지만 뿌듯함이 있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한 단계씩 밟아가며 조금씩 능숙해지는 경지에 올라가는 내 모습에 좀더 다른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이미 일은 익숙해졌고, 다른 곳으로 도전하는 것이 귀찮아져 갔다. 그냥 어렸을 때 꿈꿨던대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했다. 하지만, 세상사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 소속이 없는 자로 지내면서 부딪치고 깨져갔다. 문턱 앞에서 좌절되는 경험을 여러 번 겪고나니 다시 뛰어들고 싶어지지 않았다. 너무 괴로웠을 때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낯선 문화와 순수한 친절함에 위로를 받곤 했다.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인연과 자연에게서 나오는 좀더 겸손해지고 관대해질 수 있다는 미소어린 응원과 나와 비슷한 아픔을 나누는 위로를 받았다. 그러한 기억의 순간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2018년 새해가 밝아왔을 때, 드디어 마주하기로 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


1달여 동안의 긴 사유의 터널 속에서 고민을 했다. 어린 랩퍼가 뱉어내는 가사가 심장을 찔러댔다. 수천 번도 더 생각했으나 결국에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겁이 나서 선택할 수 없었던 그 꿈을 꽤 오랜 시간 돌아돌아 결정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고, 이제는 해야 한다는 흐름이 느껴졌다. 내가 틀에 갇히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이제야 깨달았듯이 영혼의 자유로움이 맘껏 날아다닐 수 있게 지금이라도 독자에게 글을 날려 보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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