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 남을 수 있을까?
새해가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온 H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여 퇴근 시간이 다가오기 무섭게 짐을 싸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와 이름을 부르니 뒤돌아 땡그래진 눈을 마주하자 예쁘게 웃는다. 자리에 앉으며 내가 살 테니 맘껏 주문하라 했는데, 좋은 일이 있으니 저가 사겠단다. 좋은 일?! 결혼하나?? 음... 살 좀 찐 거 같은데, 속도위반인가? 컵에 물을 따르는 찰나, 머리 안에서 팽팽 계산을 마치고 눈을 마주치니, 배시시 웃으며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올렸던 말을 꺼내며 그동안 과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박수를 짝짝 치며 부지불식에 흘러나오는 잘 됐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때쯤 H가 하는 말에 잠자고 있던 두려움이 올라왔다.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나기도 해요.
10달 동안 몸에 아이를 품다 출산하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출산 이후가 본격적인 험난함의 시작이라고 엄마들이 말한다. '애는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명언을 남긴 극성맞은 남매를 둔 어머니의 말처럼 책에서 본 대로, 강연에서 들은 대로 육아를 한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다. 아이가 있어 외출이 어려운 지인과 직접 집으로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대화는 중간중간 끊어지기 마련이고, 곁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를 지켜보면 마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과 같다. 바닥을 뒹굴러 다니는 블록과 퍼즐 조각과 장난감들은 치워도 치워도 계속 어지럽혀 있고, 숟가락질도 스스로 못 하다 못 해 손으로 주물주물 만지작 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면 체념을 넘어선 한숨이 나온다. 이러한 하루가 지나 잠자리에 들 때쯤 엄마는 부둥부둥 아이들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잠자리에 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일이 육아라 말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볼 때면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말하는 엄마가 된다.
다만 아이가 집 밖으로 나오면 달라진다. 우리의 세상은 어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선 양 손을 힘껏 펼쳐야 간신히 기둥을 움켜쥘 수 있으며, 대소변을 가리게 된지 얼마나 안 되어 생리현상을 참기 힘들뿐 아니라 변기가 너무 높아 혼자 이용하기 힘들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상황에서 불가항력에 의해 아이는 공공장소에서 실례가 되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 한 두명 어른들의 눈살이 찌뿌려진다.
이 때 엄마들의 반응이 조금 놀라웠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하며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을 섭섭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사실관계를 들으면 엄마들의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만큼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표준화 시킬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이 있기 때문에 쉬이 비판을 할 수도 없다. 간단한 예로 혼잡한 아침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탈 때 사람이 많아 아이를 번쩍 안고 뒷문으로 후다닥 타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순서를 지켜서 타야 하는데 얌체같다 할 수 있고, 버스가 얼른 출발하려면 굳이 앞문으로 기다려 타는 게 아니라 뒷문으로라도 후딱 타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미묘한 견해 차이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내 가치관을 견지할 수 있을까?
융통성이 조금 부족해 보여도 나는 기다림과 불편함을 감수해서도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행동하는 편이다. 버스에 늦게 타서 자리에 못 앉게 되더라도 나보다 먼저 기다린 사람들이 먼저 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답답하더라도 좀더 원칙을 지키고 싶고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내 자신을 꽤 사랑한다. 그렇기에 아이들 키우게 되더라도 이 부분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머님의 명언대로 아이는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무섭다. 엄마가 되는 순간, 이성적이고 작은 규칙이라도 지키려는 내 자신을 잃게 될까봐 무섭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엄마의 사랑과 헌신이 모든 예술의 소재에서 빠지지 않음에 나 또한 자식에게 맹목적으로 변해버릴까 무섭다. 내가 사랑하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면모가 엄마가 되었기에 닳아버릴까 많이 무섭다. 6,7살 때부터 세워온 나만의 삶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체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엄마가 되는 순간 이 모든 노력들이 허사가 될까 두렵다.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면, 아마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치열한 육아 도중에 틈새와 같은 시간이 생길 때면, 난 다시 노트북을 키고 앉아 여기에 글을 쓰려 할 것이고, 이는 나를 사유하는 존재로 남게 해 줄 거이다. 엄마의 에고에 굴복하지 않고 나로 남기 위해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