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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Jan 12. 2019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찰

어떻게 써야 할까?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뭘 써야 할지 탐험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주를 이루었다. 그 동안 몇 편의 글을 발행하면서 나의 고민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전 나의 글쓰기는 간단하고 명료하며 직설적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주장과 이에 대한 근거를 쭉 나열하여 쓴 설득하는 글이었다. 나야 나르시시즘에 빠져 '음~ 아주 잘 썼어. 뿌듯해~' 칭찬하며 부둥부둥 안아줬지만, 독자는 어떨까?


올해 4살이 된 나의 조카는 말을 하기도 전에 표현이 아주 분명했다. 하기 싫거나 먹기 싫으면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내미는 일명 멈춰달라는 수신호를 했었다. 제비 새끼같이 쨍알쨍알 알아듣지 못하는 옹알이를 할 때도 싫다는 의사표현은 확실히 했었다. 이 어린 생명체도 자신의 기호가 분명한데, 하물며 성인은 어떠하겠는가? 사람은 사고를 하는 존재라 경험과 지식에 따라 각자의 기호와 생각과 주장이 생겨나는데 나의 주장을 강하게 표출한다고 해서 독자에게 와 닿을까? 글에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여백을 얼마나 남겨야 하나? 너무 남기면 글이 휑해 보이는데...


머나먼 타국의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현지인들을 만난다. 모두가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기에 서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자주 의사소통에 있어 장애가 발생한다. 나는 빵이 먹고 싶은데, 그들은 튀긴 밀가루 덩어리를 준다. 처음에는 화를 내었으나 숙소에 앉아 차분히 다시 되돌이켜보면 내가 너무 많이 얘기를 했었다. 간단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얘기하면 되는데,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던져서 상대에게 혼란을 주어 처음에 말한 본래 용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무조건 정확한 문장으로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말의 길이를 덜어내었다. 비록 말은 가벼워졌지만, 마주 보며 짓는 표정과 제스처로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진다. 트래킹을 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식당에 들어가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으면 시원한 물을 가져다준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갖추어진 무언의 상냥함에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게 된다.


나의 글 또한 읽고 있는 독자에게 이러한 소통을 줄 수 있을까? 사람과 마주쳤을 때 느끼는 그 숨결과 온도를 단어만이, 문장만이 존재하는 글에도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다.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겨왔기에 가공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얘기했었다. 하지만 듣는 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누구는 화를 내었고, 누구는 다른 의견으로 반박을 했고, 누구는 침통하지만 들어주었으며, 가장 많은 이들은 외면했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배려할 줄 모른 체, 그들이 용기가 없는 자들이 몰아세웠다.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진실을 말할 때는 듣는 자의 마음을 보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거짓을 듣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지만, 진실은 잔인하기에 상처 받을 듣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잔인함의 쓴 맛을 뱉어내지는 않을 용기를 가진다.


나의 문장이 위로가 되는 씁쓸한 글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냉정하고 삼엄한 현실에서 잔인한 진실을 마주할 때 상처만을 받는 것이 아닌 약도 발라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성장에 목메지 않고 가슴 아픔에 주저앉아 울 때,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는 읽는 자를 위한 배려를 글 속에 녹여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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