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잘 써지시나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버거웠던 현실에서 잠시 해방되고자 제주도로 떠났다.
그나마 국내이기에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쉽게 서울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정한 여행지였다.
제주 북쪽 중산간에는 '송당리'라는 작은 산골 마을이 있다. 나름 시내인 세화리에서 버스로 20~30분 가면 조용한 로터리 정류소에 정차한다. 제비를 참새처럼 흔히 볼 수 있는 한적한 이 산골 마을은 놀랍게도 공항 급행 버스가 멈추는 정류장 중 하나이며, 무엇이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당기냐 물으신다면 '풍림다방'과 '달빛서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풍림다방'은 유명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된 카페로 항시 사람이 많아 자리가 나길 기다려야 한다. 기다릴까 고민하려는 찰나 콧 속으로 들어오는 먼지에 간질거려 발길을 돌렸다. 소방법 때문에 내부의 잔으로 문 앞 의자에 앉아 마실 수도 없다는 친절한 설명에 테이크아웃하고픈 생각도 사라졌다. 이럴 때는 그냥 사람 없는 카페에서 쉬어가는 게 제일이지.
'달빛서림'은 송당 로터리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위치한 작은 서점으로 주인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스레 꾸며 투박하고 소담스럽다. 먼지 잔뜩 쌓인 중고 책방의 오래된 책처럼 세월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 주인분의 깊이가 느껴진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문이 잠겨있었다. 지도 앱에는 오픈일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문에도 어떠한 쪽지조차 없어 문을 닫았나 생각했다. 이곳 말고 근처에 다른 서점도 있어 결국 그곳에서 책을 사고 커피를 마셨다.
어느덧 하룻밤만 지나면 제주도를 떠나기에 룸메이트와 '보롬왓'을 가볼까 하고 길을 나섰다. 뚜벅이 여행자가 그렇듯 도착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이리 한참을 가다 노선이 조금 다른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탔음을 알았다. 낮 시간과 저녁 시간의 노선이 조금 다르다! 바로 방향을 틀어 반대편에서 다시 버스를 타기로 하고 버스 시간까지 (배차 간격이 도시와 다르게 1시간에 버스 1대가 다닌다.) 더위를 피해 '만장굴'에 있기로 하고 내렸다. 천연 에어컨답게 동굴 내부에는 실내 온도 12도라는 조명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다시 버스를 타고 여러 노선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 송당으로 향했다. 룸메이트가 먹고 싶었다는 어느 오두막의 갈비 돈가스를 먹고 1300K에서 굿즈를 구경하고 풍림다방에 자리가 있는지 들락날락거리다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며칠 전에는 문이 잠겨 있던 '달빛서림'이 열린 것을 보았다. 부지불식으로 발걸음을 재게 움직여 서점에 들어갔다.
유리문을 통해 밖에서 살핀 것과 다르게 내부는 나무의 정감이 느껴졌다. 책의 배열 또한 주인의 취향이 한껏 반영되어 특정 작가의 책들이 함께 모여있고, 환경 보호와 채식 관련된 책들도 많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조지 오웰의 저서들이 보였고, 지난번 송당리 다른 서점에서 구입한 '한나 아렌트의 말'도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저서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하권도 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여기저기 놓인 걸 보니 주인께서 좋아하시나 보다. 다 새 책인데 이상하게 오래된 책에서 나는 퀴퀴한 책 먼지 향이 맡아진다. 고개를 들어 상단 서가를 보니 어린 시절 동네 중고서점에서 보던 글씨체와 디자인으로 인쇄된 책들이 즐비하다.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장길산'보다 더 오래전 발행된 전권이 꽂혀있다.
씨익 웃음이 난다.
다양하다기보다는 주인분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서적들과 좋아하는 작가의 저서들을 모아 진열해 놓은 방식이 아주 맘에 든다. 서점이 이리 자유분방할 수 있고, 주인의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지 못 했다. 제주에서도 서울에서도 꽤 여러 곳의 작은 서점들을 다녀봤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읽고 싶었던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안아 들고 계산을 하기 위해 주인 분에게 다가갔다. 잠을 많이 못 주무신 듯 살짝 풀린 눈과 졸음 섞인 흐릿한 목소리로 멀리서 찾아온 지인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메밀꽃 같이 수수하며 풀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주인 분에게 며칠 전에 왔다가 문이 잠겨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미안하다는 말만 여러 번 하시며 어쩔 줄 몰라하자 근처 동네 지인분이 말하시길, 제2공항을 위한 길을 내려고 비자림 숲을 밀고 있는 현장에 가서 반대 운동을 하기 때문에 문을 닫으셨다고 하셨다. 아... 조용하고 평범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신념을 갖고 굳게 실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사시는구나. 서점에서 파는 물품들이 환경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제품들도 이루어진 이유가 있구나. 물통을 닦기 귀찮아서 습관처럼 사서 쓰고 버리는 생수병이 생각났다. 그냥 귀찮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나태한 생활습관이 창피했다. 잔잔히 미소를 지을 뿐, 어느 누구도 환경보호를 소리 높여 얘기하지 않았으나 이 작은 서점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서기 아쉬워 조지 오웰을 좋아하냐고 말을 건넸다. 그를 느끼고 싶었던 미얀마 여행의 아쉬움과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태도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행동력까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로 끝맺은 나의 말에 주인분께서 "그러게요~" 동의하시며 넌지시 물어보셨다.
"글은 잘 써지시나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지난 두 달 동안 시도조차 못 했다.
상처가 깊어 손을 놓고 멍하니 흐르는 한강만을 바라보았다. 현실을 살아야 하니 운동도 하고 시험도 봤지만, 진짜 나의 업(業)이라 생각한 글을 쓸 엄두가 않았다.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지금 내 안에 차 있는 것은 좌절과 슬픔, 그리고 어리석음인데...
부끄러움에 낯선 이에게 쉬이 말하지 못했던 글쓰기를 주인분께서는 몇 마디의 말로 알아채셨다.
'그대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군요. 글을 써야 하는데, 언제쯤 좋은 글이 나올까요. 당신도 안 나와서 힘들죠?'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주 많이 다르게 살아가지만 같은 존재이다. 잠깐 시선이 마주치자 같이 씩 웃고 고개 돌려 각자의 몫으로 놓인 눈앞의 길을 보았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어느 시점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찰나였으나, 어디서도 받지 못해 본 낯선 무언의 위로였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하늘의 구름을 보며 몽글몽글 마음과 감성이 피어난다. 처음으로 앱을 열어 스마트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안에 담겨 혼돈스레 섞이기만 했던 감정과 느낌을 정순하게 끄집어내어 넘치지 않게 써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점의 나 자신의 찰나를 쓰자.
아주 오랜만에 시를 한 편 쓰고 다시 차창밖으로 구름에 눈을 돌렸다. 드디어 새 글을 올렸다.
** 2021년 현재 달빛서림은 서실리 책방으로 바뀌었고, 풍림다방은 근처로 가게를 옮겨 영업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