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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May 11. 2018

내가 느끼는 감정을 쓰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아야 하는 영역

얼마 전, 페친 분의 글을 읽다 '나는 슬프기에 글을 쓴다'라고 쓰인 문장을 봤다. 슬픔이 묻어 나오는 그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이 문장에서 한동안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글로 부끄럽지 않고 싶은 자로서 다시금 자신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슬픔을 글로 쓴다?


동물농장,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글쓰기 목적을 드러내면서, 사람이 왜 쓰는지에 대해 크게 4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욕망. 
둘째, 의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 열정. 
셋째, 역사에 무언가를 남기려는 충동. 
넷째, 타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 (오웰 자신의 목적)

이 분류가 절대적으로 옳다 할 순 없지만, '나는 슬프기에 글을 쓴다'는 네 가지 중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순한 자기 위안이라 치부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치하의 조국에 대한 슬픔을 글로 남겼다. 독립에 대한 열망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부끄러움이 잔뜩 담겨있는 그의 시는 100년의 시간을 넘어서 지금도 읽히고 있다. 


설명은 어렵지 않다. 어제 산 토스터기의 설명서를 보고 있으면, 한글만 읽을 줄 알면 토스터기를 잘 사용할 수 있어 보인다. 다른 종류로 글쓰기 특강이란 유시민 작가의 책을 봐도 읽기에 전혀 어렵지 않다. 구직 활동 때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잘 쓸 수 있을 거 같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모든 토스터기 구입자들과 책을 구매한 독자들도 나와 비슷하게 여길 것이다. 음~ 알겠구먼!


그러나 감정은 어려워 보인다. 우선 내가 느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분노, 폭소 등과 같이 극대화된 감정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지금 창밖의 푸른 나무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고백하자면 위의 적힌 '분노', '폭소'와 같은 단어도 술목(서술어+목적어) 구조이며, 그 감정을 형용사로서 표현하기 쉽지 않았다. '매우 화남', '아주 웃김' 외에는 남루한 나의 표현력으로 적당한 형용사를 찾기란 어렵다. 어찌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좋아하는 나이지만, 감정의 영역 앞에서는 나의 이성마저 이해시키기 쉽지 않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 붙이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나는 그렇게 설명을 주절주절 썼나 보다. '호모 (익스) 플레인스'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주절주절한 감정을 읽고 타인을 이해시키길 바랐나 보다. 칼로 쪼개지듯 나누어질 수도 없고, 모순적이고 상반되나 공존할 수도 있는 감정을 두고 그토록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으니, 점점 자기 합리화하여 견고한 돌벽과 같이 굳어가는 사고의 말과 글이 될 수밖에 없나 보다.


누군가가 말했다. 머리 안에 혹은 마음 안에 있는 관념이 말이란 수단으로 밖으로 꺼낼 때, 본래 내 안의 의미가 변하고 퇴색되어 표현되는 것 같아 더욱 말을 하기 싫어진다고... 

들었을 때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그의 느낌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불현듯 말을 하는 것이 아주 쓸모없다며 내 머릿속을 내리꽂았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조용히 앉아 있는 나에게. 당시의 나는 무력감이 감싸고 있었고 이를 토해내는 나의 말은 내 안의 느낌을 오롯이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 언어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말은 왜 하며 글은 왜 쓰는 것인가? 나는 왜 쓰는가??


수학책을 펴면 양 끝에 귀여운 화살표가 있는 직선이 좋았다. '두 점을 잇는 가장 빠른 최단거리'라 정의되어 있어 속도감 있는 직선이 좋았다. 곡선이 아름다우나 느릿해 보여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우는 2차 함수, 포물선, 타원은 모두 곡선이었다. 미분하여 표기되는 무수한 직선의 1차 함수들이 모여 2차 함수의 변화를 보여주고, 이 변화들을 모으면 곡선이 되었다. 명쾌한 직선이 좋아 마구마구 모아놓았는데, 결국에는 곡선이 되어버렸다. 난 바로 '정답'을 찾아 돌진해서 뿌듯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등산을 하면 곧게 올라만 갈 수 없어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가야 하듯 나도 돌아 돌아가야만 '마음'이라는 산꼭대기 나무에 도달할 수 있었나 보다. 


사람의 마음 앞에서는 효율적, 합리적, 빠르게 같은 지난 사고의 방향은 조금 넣어두어도 괜찮을 듯싶다. 나의 슬픔이, 기쁨이, 행복은 수치화되지 않으니 충분히 느끼고 누릴 여유를 가져도 된다. 무엇보다 나의 지난 삶이 말해주지 않는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맞추어 내 인생이 굴러가지 않으며, 길 위에서 느낀 감정으로 나의 마음이 단단해졌을 때 생각지 않게 삶이 흘러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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