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기리다.
밤늦은 시간 잠자던 전화벨이 울렸다. 이 분이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한다고?? 의문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 오늘... 돌아가셨어... 단톡방에는... 내가 올릴게."
단 몇 분의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놀라 입을 벌리고만 있었을 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년 전부터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부고를 알리는 연락들을 받게 되었다. 놀라서 달려가면 그 옛날 앳된 나와 함께 했던 인연들이 몇 테이블에 가득 앉아서 오랜만이다~ 인사를 한다. 여전히 우리는 대학생 시절의 그 얼굴로 앉아서 근황을 얘기하고 그 시절 우리를 추억하는 동안, 들어오시는 할머님께서 꺼이꺼이 우시면서 이렇게 가서 어떡하냐고 뱉으시는 그 슬픔이 적셔진 울음에 어느새 숙연해진다. 목이 매이는 육개장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한창 손님맞이를 마치고 다가오는 검은 옷 입은 퀭한 얼굴의 상주를 보면 현실의 나로 돌아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어깨가 좁아진 부모님을 떠올리며 상대의 슬픔에 스며든다. 초점이 나간 눈으로 조잘대며 장례식장을 돌아다는 어린 자식을 간신히 부둥켜안고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삭히는 모습과 툭 건드리면 금세 오열할 것 같은 눈으로 횡설수설 말하는 상주를 보면 언제나 밝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원천인 샘이 산사태로 붕괴되어 말라가는 물줄기에 시들어가는 버들나무같이 휘청이는 위태로움은 갑작스럽게 부모님과 헤어지는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이러한 슬픔 속에서 나의 친구는 의료사고니 소송을 하자 말자 왈가왈부하는 주변 어른들에게 간곡한 부탁의 말을 썼다. '아버지 가시는 길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히 아버지를 기리고 싶습니다.' 수술 전 집으로 방문하는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수술이 잘 될 거라 얘기하던 친구와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두 눈에 담았던 나는 차마 작은 위로의 말 하나 보낼 수 없어 결국 3달 후에 다시 비행기표를 끊고 친구를 보러 갔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내는 의식을 마치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온다. 출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한다. 평소 같이 저녁을 짓고 돌아오는 배우자를 기다릴 때나 퇴근길에 있는 단골 식당을 들릴 때 느닷없이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른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그날의 힘듦을 얘기하면 조용히 들어주며 슬쩍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밀어주시는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는 자식은 눈물이 쏟아진다. 집에 가면 현관문을 열고 바로 맞아주실 거 같은데, 이제는 안 계신다. 다시 만날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눈 깜짝할 새에 변한다. 지하철은 항상 오던 그 시간에 또 오고 항상 출근길 버스의 그 자리에 앉아 조는 저 사람은 여전히 앉아 졸고 있다. 숨쉬기 더웠던 공기는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 머플러를 두르지 않으면 춥다. 그동안 자식은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 조금씩 슬픔도 무뎌져 가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차를 타다 저도 모르게 아빠 엄마를 찾는다. '아... 돌아가셨지.' 그렇게 조금씩 일상 속에서 부모의 부재를 느끼며 슬픔을 조금씩 희석시킨다.
사람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오로지 존재하기에 그 가치는 충분하다 말한다. 외모가 출중해서,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지혜롭고 똑똑하기 때문에, 상대를 편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등의 이유가 아닌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는 충분하다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이를 증명해준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문구가 있듯 존재하던 이가 사라지자 남겨진 자들은 삶의 한 순간 가끔 튀어나오는 그 부재를 느끼며 슬퍼한다.
10년을 함께 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영화를 봤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을 글로 토해냈다. 그때의 내 글은 온통 서술로 가득 찼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온갖 잘난 척을 가득 써 놓았다. 그런데 내가 영화를 본 이유이자 글에서 가장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그리워요 였던 거 같다. 사촌 동생이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기 전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나의 감정.
사회는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멈춰 있으면 너는 도태될 것이라 겁을 준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달려야 한다, 돌아가신 분도 네가 슬퍼하기만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말한다. 그렇지만 좀 더 슬퍼하면 안 되는 걸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내 마음에 충실해 주면 안 될까? 슬픔을 충분히 드러내다 못해 결국은 내가 슬픈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