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으면 난 가치가 없어지는 존재인가?
사는 이유나 존재 가치가 노래 말고는 없기 때문에
이거를 그냥 해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거야.
여행하며 버스킹을 하는 예능을 보다 50을 향해 나이먹어 가는 어느 가수의 말이었다. 꽤나 충격적이었으며, 노래 외의 삶에 대한 조금의 기쁨도 찾아볼 수 없는 허무하기 그지 없는 마음이 느껴졌었다. 한편으로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 나도 한때는 저렇게 생각하고 살았지. 어려서부터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력에서 살아왔기에 시간이 흘러 삶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올 때쯤이면 인생에 대한 회한에 젖어 저런 허무함으로 살았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아주 훌륭한 작품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쓰레기를 날짜에 맞춰 버리고 마트에 가서 계산이 똑바로 되었는지 확인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감정이다.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와 가치를 모르겠다. 그냥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왜 이리 아둥바둥 살아야 할까? 어느 누구에게도 쉬이 물어볼 수 없는 주제에 대해 그냥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살아야 했다. 방 구석에서 책만 읽어대던 아이는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세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장소를 다녔으며, 좋아하지 않지만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하고, 나만의 주제를 가지고 사유를 하며 생각의 DB를 쌓아갔다. 가끔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넘쳐 흐르는 사유의 폭포가 감당되지 않을 때는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들겼다. 사유의 끝에 도달한 결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글 밖에 없었기에, 가진 것이 오랜 사유의 결론들을 정의해주는 비루한 문장 밖에 없었기에 나만의 공간에 다다다다 두들겨 흔적을 남기었다.
사유의 끝에 힘겹게 뱉어지는 결론들을 되뇌이며 스스로 저명한 학자라도 된 마냥 우쭐함에 어깨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난 똑똑해. 아주 명석하군. 역시 아주 대단한데! 난 매우 특별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지. 암암~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어려운 관념을 다룬 학자들의 책과 이론을 읽고 이해하려 했다. 물론 내면에서는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말하였으나, 이 역시 포장된 합리화 였음을 고백한다. 한 페이지조차 넘기기 힘든 글을 쪼개고 쪼개서 읽다, 대화 중에 조금 어려운 관념과 단어가 나온다 싶으면 쪼르르 갖다붙여 말하다, 결국 읽기를 포기한 책들을 베란다 한 쪽으로 치워버렸다. 원인도 모른체 꽤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읽은 책이 여행용 안내책자였음에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리고 조바심이 났다. 철학적 사고를 더 이상 성장시킬 수 없으면 어떻하지?
출입국 신고서를 쓰기 위해 반드시 가지고 가는 여행책자와 함께 언어소통이 수월하지 않는 동남아으로 몇 번 여행을 갔다. 정확히 시간을 지키지 아니한 여기저기 돌다 오는 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험한 산맥을 비포장 도로로 넘어가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숫자도 못 읽는 외국인이 잔돈도 없자 선뜻 자신의 지갑에서 차비를 꺼내주던 베품과 사탕을 주는 낯선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어린이의 천진함과 버스에 두고 내린 유실물을 찾아서 호텔로 갖다준 친절은 나에게 쉽게 닿을 수 없는 감정을 안겨 주었다. 한국의 기사에서 접하는 동남아 노동자에 대한 냉대와 무시 및 사회에 만연된 돈을 지불함으로써 갖는 권리로 부리는 갑질 등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놓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왜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될까? 헬스장에서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말도 똑부러지게 잘 하시고, 손도 빠르게 부지런히 움직이여서 바닥의 물이나 수건 등을 후다닥 치우신다. 본인의 업무처리도 잘 하시고 회원분들과 인사도 잘 하고 대화도 나누시며 관계도 좋다. 아마 집으로 가시면 누군가의 어머니실 것이며 아들딸에게는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노동을 하여 생활을 꾸려나가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들에게 하는 일의 귀천(貴賤)을 말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하여 다들 살기 위해 고생한다는 생각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번져가니 타인의 실수와 마주할 때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 나온다.
좀더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는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 했지만 나는 매우 사랑한다. 그러면 헬스장 아주머니의 아들딸도 그렇겠지? 엄마가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엄마라서 사랑하겠지? 엄마아빠를 사랑하는데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한가? 반대로 엄마아빠는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랑하실까? 만약 내가 다쳐서 걸을 수 없게 되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되면 엄마아빠는 쓸모가 없어졌다고 날 내다버릴까? 바르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난 지금 우리의 모습이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령 조실부모 하였어도 세상 사람들의 진심어린 작은 사랑을 모아모아 전달해주면 이러한 작은 사랑들이 모여 큰 사랑을 느끼지 않을까?)
나는 무엇이기에 이리 사랑받는가? 똑똑하기에, 외모가 출중하기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에,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러서, 몸으로 고운 동작을 창조해 내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려내기에 등의 이유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존재하기에, 생명으로 존재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받고 주는 게 아닐까?
아... 드디어 오랜 궁금증이 풀렸다. 내가 사는 이유는 존재하기 때문이며, 나의 가치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