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연상되는 단어
여러 사람이 오가는 분주한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한 장을 보자, '바로 여기군! 유레카~'를 읊조리며 지하철역과 연결된 거대한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쿵쾅쿵쾅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카운터 너머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넓은 그라운드와 수십대의 런닝머신, GX 수업 전용 스튜디오, 다양한 운동기구들을 소개 받고 상담 직원과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눈다음 그 날 바로 1년치 회원권을 끊었다.
평소처럼 헬스장으로 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주섬주섬 회원카드를 꺼내었다. 같이 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사물함 열쇠를 받기 위한 준비였다. 쿵짝쿵짝 노래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평소와 다르게 가장 눈에 띈 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휠체어를 탄 남자 분이었다. 그리고 그 분 뒤로 넓은 공간에서 PT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분이 헬스장을 이용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칭하는 곳은 문턱이 없다. 나름 공간이 넓어 사람 많은 저녁에도 여러 명이 PT를 받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 와도 공간이 충분하다. 탈의실과 샤워실, 락커는 한 층 아래에 위치한다. 계단으로만 내려갈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게 조치해놓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락 하기 귀찮다고만 느꼈다. 단지 이로 인해 누군가는 헬스장을 이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아니, 휠체어를 탄 사람이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온다고 상상조차 안해봤다. 헬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며 사장도 나와 같을거라 의심치 않는다.
불공평하다. 짜증나게 불공평하다. 그냥 아주 많이 짜증나게 불공평하다.
하다못해 엄마아빠가 내 형제만 이쁘다고 부둥부둥 안아주며 편애해도 상처가 깊은데, 일상 생활 속에서 이러한 차별을 항상 맞닥드리며 소외 받아야 한다. 그런데 더 짜증나는건 두 발로 번화가를 걸어다니는 저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고?' 의문을 품을 것이라는 거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나 떠올려 봤다.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오는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운 낡은 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중증 장애인의 모습과 수술비가 없어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침상에 누워만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연상된다.
가끔 장애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사시에 합격한 분들이나 자폐나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회사의 이야기가 특별하다며 조명되어 기사화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음미하는 장애인,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애인,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애인, 길에서 공연을 하는 장애인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스쳐가며 볼 수 있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다. 실제 이러한 공간 속에서 장애인을 보면 나도 모르게 흠짓 놀라거나 우와~하며 나지막히 탄성이 나온다.
나의 짜증은 스스로의 무의식적인 구분에 대한 반발이었다.
미디어로만 학습된 이미지로 보통 사람과 장애인을 구분해 놓고 불쌍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가여운 존재로 규정지어 놓고 있었다. 연민과 동정으로 제멋대로 선을 그어 놓은 후, 배려와 양보라는 미명 아래 소외시키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일상을 향유하는 장애인에게 감탄과 놀라움을 갖는 것 자체가 차별임을 인지 못한 무지는 일상 속 투쟁이 삶이 된 장애인에게 또 다른 폭력이었다.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싶어하는 내가 특정 사람들에게 특수함을 정의내려 놓고 남다르다 구분해 놓았다.
내가 내린 엘리베이터를 타는 휠체어에 앉은 그 분을 시크하게 지나쳐 평소처럼 카운터로 걸어가 아무 말 없이 수건과 락커 열쇠를 받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가는 행인1처럼 처다보지 않는 것.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