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을 예찬한 그림들

네덜란드 장르화가 전해주는 일상의 아름다움

by 희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기란 쉽지 않다. '일상'이라고 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일기장 앞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기억해내려고 애써야지만 생각이 나는 순간들. 그러지 않고서야 금방 잊히고 마는 하찮은 순간들의 반복이다. 적어도 나의 일상은 그랬다.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그 순간들을 그리워할 때가 있긴 있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생기고 그 일상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때 그랬다. 그러나 바쁜 현실은 금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만들고 반복되는 나의 하루에 또다시 무뎌지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일기를 써보려고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면, 딱히 기억이 날 만한 일이 없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금세 덮거나 몇 개월을 합쳐 인상 깊었던 사건 혹은 나에 대한 진지한 성찰만 적기 일쑤였다. 나의 하루는 노트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할 만큼 사소하게 여겨졌고, 진한 허무함과 함께 하루는 그렇게 사라져만 갔다.



그런 '일상'에 주목한 그림들



피터 드 호흐, <Woman peeeling Apples>, 1663


그런데 무엇보다 그런 ‘일상’을 사랑하여 하나하나 기록하여 탄생한 예술 양식이 있다. 바로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다. 위의 평화로워 보이는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드 호흐'의 작품 중 하나이다.


위 그림을 보면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인 '집'안에서 차분하고 따스한 노란빛이 들어오는 창문 아래에 한 여인과 그녀의 딸로 추정되는 아이의 모습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은 차분히 앉아 가정일을 하는 것 같고 아이는 옆에서 그녀를 돕는 것 같다. 당시 시대의 흔히 볼 수 있는 정답고 평화로운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다. 장르화가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게 이게 다라는 것이다.


보통 예술작품에는 복잡한 사회 정치적 관계가 얽혀있거나 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숨겨져 있어 그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17세기에는 종교화나 역사화가 널리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어떠한 종교적,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그저 서민들의 일상 순간을 스냅으로 찍어낸 듯 너무나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얀 스텐, <성 니콜라스의 축제>, 1665


네덜란드 풍속화가 얀 스텐의 작품인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으로 시끌벅적하고 꽉 찬 듯한 집 안의 풍경이다. 반짝이는 금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선물 받은 사탕바구니와 세례 요한 인형이 매우 흡족한 듯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의 옆에 있는 울고 있는 남자아이는 어떠한 연유에서 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가리키며 웃고 있는 곱슬머리의 작은 남자아이의 표정이 짓궂다. 아마 울고 있는 아이는 산타클로스의 유래인 성 니콜라스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처럼 대가족, 혹은 정다운 이웃이 한 집안에 모여 웃거나 울거나 놀라거나 비웃거나 등 다양한 감정들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고 있다.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서민들이 한데 모여 어울리는 화목한 모습은 따듯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인다.

이처럼 서민들의 일상에 주목한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는 종교화나 역사화와 같이 상상의 세계가 혼합된 양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그린 최초의 사실주의적 회화양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 신화, 역사적 인물에서 벗어나 여태까지 엑스트라 취급을 받았던 이름 없는 서민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은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무역의 활성화가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무역활동의 주였던 중산층이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또한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과 더불어 개방적인 무역활동으로 인해 타문화와 다른 종교를 관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즉 부의 축적과 문화의 발달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가 네덜란드 17세기였다. 그러므로 예술 분야에서도 기존의 관습이나 양식을 탈피하고 새로운 양식인 장르화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미덕과 악덕이 공존하는 장르화


장르화가 서민들의 일상만을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서민들의 모든 모습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여인이 차분하게 가정일을 하는 모습이나 아이를 교육하는 모습은 그 시대에서는 인내, 순종, 겸손을 나타낸 가정적 미덕이라고 여겨졌다.



얀 스텐, <Festive Family Meal>,1674


반면에 위의 그림을 보면, 어린아이가 공존한 공간에서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음주를 즐기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들은 당 시대에서는 악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표정은 매우 즐거운 듯 생기발랄하고 흥이 넘친다.



드 호흐, <두 남자와 술 마시고 있는 여인과 하녀>,1658


이 작품에서도 '음주'라는 악덕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창문을 투과하여 들어오는 은은한 주황빛이 이들을 따듯하게 물들인다. 그 모습은 평화로움을 넘어 어쩐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악덕이 담겨있다 하더라도 악덕에 대한 일방적 비난이 아니라 악덕과 미덕이 혼재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삶에 대한 승인을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악덕의 요소가 평화로운 풍경과 일상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악덕 역시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하녀>,1658


또한, 장르화가 주로 다루는 모습은 여성들의 일상생활이다. 위의 작품은 그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다. 말 그대로 여인이 우유를 따르는 모습이다. 누가 여인이 우유를 따르는 모습에 주목하여 작품으로 남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일상의 한 순간을 행하고 있는 여인은 베르메르에 의해 따듯하고 섬세하게 작품의 주인공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장르화는 평범한 여성과 그런 그녀들의 일상의 순간순간들을 시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물론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과 같이 장르화 속 여인들은 가정일을 하거나 치장을 하는 모습뿐 아니라 쾌락의 주체가 되어 음주와 매춘을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장르화의 특징인 빛과 색감의 아름다운 조화는 미덕, 악덕과 관계없이 작품 속의 모든 여성을 예찬하는 듯 보인다. 이는 당시 여성들의 위상을 높이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가부장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장르화 이전에 여성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한 주목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덧없음,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예찬받을 수 있다


'미덕'과 '악덕'. 우리는 미덕을 지키고자 하고 악덕을 없애고자 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을 보면 이처럼 미덕과 악덕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장르화에는 빛, 절제, 기쁨, 행복, 고요함뿐만 아니라 어둠, 욕망, 절망, 슬픔, 혼란이 공존해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름 아닌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미덕과 악덕을 모두 포용하고 있으면서 삶에 대한 충만함과 천진난만함을 뿜어내고 있다. 마치 삶을 미덕과 악덕 사이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나는 장르화를 보고 삶에 대한 덧없음을 느꼈다. 미래에 대한 이상으로 내일만을 바라면서 오늘 하루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하루의 순간순간에 대한 예찬은 그러한 순간으로 구성되는 현실의 삶을 매우 가치 있게 만들어버린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어떤 거창하고도 숨겨진 의미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의 순간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일상 그 자체를 예찬했을 뿐이다. 일상의 순간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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